[원로에게 듣는다]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한국경제신문은 창간 37주년을 맞아 40여년간 이화여대에서 후학양성에 힘써온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과 대담을 가졌다. 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가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윤 명예총장은 한국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로 교육문제와 여성의 법적.사회적 지위향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한국여성학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장관급)을 역임하기도 했다. 윤 명예총장은 대학은 인간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적 상아탑과 사회에서 필요한 기능을 가르쳐 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공교육의 정상화와 특성있는 대학의 육성도 시급하다고 밝혔다. [ 대담=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 ] ------------------------------------------------------------------ 이주향 교수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법학자로서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선생님에게 법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윤후정 명예총장 =일제시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적 수난과 농촌여성의 힘겨운 삶에 많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커서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과 여성에게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다 처음엔 정치를 염두에 뒀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다면 모를까 일개 여성으로 사회 변화에 끼치는 영향은 모래알 정도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법학자, 교육자의 길을 택하게 됐습니다. 법학자의 임무는 정의가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고 사회와 민족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 교수 =사회가 변하는 속도를 대학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윤 명예총장 =21세기는 굉장히 빨리 변화하는 디지털 사회라는 점에서 그런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본질, 대학의 기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학은 양대 목적과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격을 바탕으로 인간 사회 세계가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이끌고 사물에 대한 통찰력 창의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적응해서 살수 있는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학은 이 두가지 목적을 조화롭게 추구해야 합니다. 이 교수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 명예총장 =학생들의 선호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학문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선 인문학의 존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만 지망자 수를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질과 의욕을 가진 학생들에겐 소수라도 심화교육을 시키고 다수 학생들에겐 교양교육을 통해 인문학을 가르치는 방법이 바람직합니다. 자연과학 분야처럼 특정 인문학분야를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요망된다고 봅니다. 대학 자체도 인문과학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한번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교수 =지난 50년간 교육분야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대학교육에 대해선 산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배출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기계화된 교육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엇갈린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윤 명예총장 =평가가 엇갈린다기보다는 산업화를 위한 기술인력의 대량공급에 치우치다 보니 인성교육이 결여됐다는 평가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대학의 입학전형에서도 지적능력 테스트에 치중했고 중등교육기관에서도 도덕성이나 가치관, 리더십 교육이 경시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대학은 정신적 상아탑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업양성소만도 아닙니다. 양쪽을 다 만족시켜야 합니다. 예를들어 전문직업성이 강한 학과에선 인문학을 더 강조하고 인문학과는 전문성을 더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교수 =사교육비 부담이 너무 많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과외를 받는 학생들이 있다고 합니다. 학교는 출석하러 가고 공부는 학원에서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사교육이 성행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윤 명예총장 =하나는 우리 국민들의 강한 교육욕구 때문이고 또 하나는 공교육의 부실 때문입니다. 학교가 학원보다 나을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학교가 학원보다 교육내용과 시설에서 우수할 경우 사교육 부담은 줄어들 것입니다. 공교육에 대량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거창고등학교처럼 방과후 활동을 활성화함으로써 학생들이 학원에 가지 않는 것은 좋은 사례라고 볼수 있습니다. 2002년부터 초중고 각급학교의 학급정원을 35명으로 줄이는건 이런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수 있습니다. 또한 소위 일류대학, 특정대학에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대학별 특성화를 강화해서 풀어가야 합니다.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 것은 유아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유아교육은 거의 사교육기관에서 전담하고 있는 실정으로 부모들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공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선 우선 유아교육의 점진적 의무교육화가 필요합니다. 이 교수 =한국사회에서 특정대학을 졸업할 경우 평생 기득권이 보장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학 특성화가 이런 문제를 푸는 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특성있는 대학을 만들수 있겠습니까. 윤 명예총장 =사람 능력을 여러 측면에서 측정해 이를 반영할수 있도록 입학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대학평가에 있어서도 총론보다 특정분야에선 이 대학이 최고라는 식의 특수분야별 평가가 이뤄져야 합니다. 이 교수 =교육계에도 연봉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견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교수 연봉제 도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윤 명예총장 =연봉제 확산은 하나의 추세인 것 같습니다. 연봉제 도입은 인센티브를 이용한 수업의 질과 교수의 연구 수준 향상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학교육의 질도 높아져 세계 우수대학으로 커갈수 있고 국가경쟁력도 자연스럽게 높아져 선진국 반열에 들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객관적이고 전문적이며 타당한 평가방법을 마련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원이나 교수들의 통제수단으로 활용해선 안된다는 점입니다. 이와함께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옮겨도 경력이나 호봉등에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 '모빌러티'(mobility.이동성)도 전제돼야 합니다. 이 교수 =대학의 행정도 과거와 달리 학생, 즉 수요자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업식 대학경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윤 명예총장 =수요자중심 교육에 대해선 기본적으론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환경학 등 신학문분야와 함께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교육 등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교과과정을 개설해 학생들의 선택권을 넓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실력있는 교수 확보, 각종 학교시설의 현대화 등 교육에 대한 투자확대가 이뤄져야겠죠. 하지만 교육활동을 전적으로 서비스로만 보는 건 곤란합니다. 1957년 구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한 이후 교육분야에 대거 투자해 많은 교구와 교재가 개발됐지만 실용성과 유용성이 결여돼 있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소비자중심교육(Consumer-Oriented Education)을 강조했지만 결국 핵심교과 심화발전이 저해되고 교육 본질이 훼손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수요자 중심교육을 강조, 인기교과나 쉬운 교과에 치중하게 되면서 학문의 균형적 발전이 저해되는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학은 수요-공급의 시장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수요자만이 아니라 교육목적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기업식 대학경영도 능률을 올리거나 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일리가 있지만 대학이 이윤추구의 기구가 아니라는 점을 늘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의 본질을 생각하며 질좋은 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학교 환경을 개선하고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교과 선택권을 주는 등 시대상황에 따라 탄력적 운영이 필요합니다. 이 교수 =교원들의 재교육도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교육계에 몸담아 오신 분으로서 재교육에 대한 투자의 필요성을 느끼셨을텐데. 윤 명예총장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교사연수제를 강화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교사 재교육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인터넷 재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등도 필요할 것입니다. 한번 교사자격증을 받으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유지되는 현 제도는 곤란하죠. 이 교수 =평소 '인간 그대로의 여성', '인간으로 대접받는 여성'을 많이 강조하신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윤 명예총장 =여성도 주체성을 갖고 살아야지 종속적 보조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도 권리와 책임을 나눌수 있는 여성이 '인간됨의 모습으로 사는 여성'입니다. 이 교수 =그러기 위해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경제가 나빠짐에 따라 여성문제도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윤 명예총장 =한술에 배부를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성이 갑자기 모든 걸 한꺼번에 얻을수는 없어요. 꾸준히 노력하고 해결방법을 찾아야죠. 어쨌든 여성이 가정생활과 직장 사회생활이 양립할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 모두는 협조해나가야 하며 사회도 여성의 위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정리=강현철 기자 hckang@hankyung.com ------------------------------------------------------------------ [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약력 ] 1932년 함남 안변 출생 1955년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1972년 미 노스웨스턴대 법학박사 1958.4~1997.8 이화여대 교수 1979.6~1985.8 이대 법정대학 학장 1984~1986 한국여성학회 회장 1990.9~1996.8 이대 총장 1996.9~현재 이대 명예총장 1998.3~1999.3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장관급) 2000.9~현재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 주요 저서 : '법 여성학'(1989) '기본적 인권과 재판-미국 대법원 판례'(1992) '기본적 인권과 평등'(1997) '여성의 인간화를 위하여'(1997)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