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26.끝) '인간 김우중'..변경(邊境)의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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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패망비사가 종착역에 왔다.
이제 김우중 회장을 만나는 시간이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준(準)사기꾼'이었던가, 아니면 시대를 정면돌파해 나간 모험가였던가.
사실 지난 25회동안 연재해온 '대우패망비사'는 그 전부가 '김우중 연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起業)과 몰락(沒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 자체로 치열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와 대우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중심은 아닌, 그래서 변방이며' '1등은 아닌, 그래서 차순위의 질서를 추구했던' 야만지대의 정복자였다고 할 수 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신천지로 떠오른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질주했던 김우중과 그의 군단이 도달한 곳은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다.
개도국 전체를 함몰시켰던 세계적인 금융위기며 처절한 미국 금융자본의 논리가 운명의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 폭군
지난 24회에 연재한 '대우 사장단회의 풍경'에서 그는 마치 폭군처럼 도도하고 일방적이었다.
'한마디로 해 봐.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거야'라는 질책은 '폭군' 김우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런 측면은 개발연대형 인간, 예를 들어 박정희나 정주영 등에서도 동시에 나타나는 성향이다.
대통령 선거마다 대항마를 띄우고 그것으로 절묘한 정치적 흥정과 타협을 해나간 것도 그의 장기였다.
대통령 당선자 김영삼이 "뭐야, 그 사람 사기꾼 아니야!"라고 고함질렀다는 얘기는 김 회장의 정치적 계산속이 정치9단을 능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슨 일로 YS가 격노했는지는 언제가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고독한 기업가
대우 옥포조선이 자금난과 노사분규에 휩싸였던 1년6개월동안 현장에서 숙식하며 위기를 벗어날 때 김우중은 '혼자'였다.
참모들은 그의 분신이었을 뿐이었다.
김우중의 현장 경영은 언제나 1인 경영을 의미했다.
92년 미국 자동차회사 GM과 결별한 다음 부평공장의 17평짜리 사원 기숙사에 상주하며 신모델 개발에 열을 올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 상인
대구 피난시절 신문을 팔았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김우중이 고심 끝에 발견한 수단은 거스름돈을 미리 종이에 싸서 준비해 두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성이 차지 않았던 그는 신용거래 방식을 고안해 낸다.
신문을 먼저 돌리고 대금은 나중에 회수키로 한 것.
돈을 떼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년 김우중은 결국 대구 방천시장 신문 판매를 제패했다.
바로 이 노하우가 대우 32년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미리 판다'는 바로 이 상술이 나중에 대우그룹의 치명적 약점, 다시 말해 외상매출의 누적과 결과적인 부채 과다를 불러온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 4무(無)
그의 평생 친구인 석진강 변호사는 김우중을 4무(無)로 표현한 적이 있다.
무주(無酒), 무색(無色), 무유(無遊), 무가(無家)를 일컫는 것이다.
한마디로 워커홀릭, 즉 일중독증 환자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아하는 음식은 가장 빨리 나오는 비빔밥과 설렁탕이었다.
일분 일초가 아까운 그에겐 해외출장 때도 식사의 절반이 샌드위치였다.
음식과 관련된 일화 하나.
김 회장이 1980년대 후반 캐나다에 출장을 갔다.
수행 임직원들과 함께 들른 한국식당에서 김 회장은 이날도 가장 빨리 나오는 비빔밥을 시켰다.
물론 참석자들도 따라서 비빔밥을 시켰다.
이때 말단 직원 한명이 대구탕을 주문했다.
결국 일찍 식사를 끝낸 '높은 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말단'은 가격도 몇 배나 비싼 대구탕을 천천히 먹어치웠다.
김 회장이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왜 대구탕을 시켰나"
"이 동네 대구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혼쭐이 난 것은 그 말단직원이 아니라 이 지역을 맡고 있던 임원이었다.
그렇게 유명한 상품이라면 이를 상품화해 팔려는 생각을 해야지 뭐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 전략가
김우중은 기업가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창업보다는 기업인수(M&A)가 많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73년부터 적자투성이었던 동남전기(대우전자)와 한국기계,대한조선공사(대우중공업 조선부문), 새한자동차를 차례로 인수해 갔다.
김 회장 자신은 이렇게 얘기했다.
"한국 수준에서 갑작스레 선진 기업들과 경쟁하라는 것은 공론(空論)이다. 그렇다고 두 손 묶고 있어야 하나. 평균적인 품질의 제품과 기술력을 유지하면서 저돌적인 마케팅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은 대우 패망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만하다.
김 회장은 원천기술과 1등상품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전면 유보한 토대 위에서 대우라는 건물을 구축해 갔다.
◇ 팽창 본능
대우의 세계경영이 구체화한 것은 냉전이 끝나면서부터였다.
무인지경에 돌진해 들어가지 않으면 한국蓚汰?잘해야 2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옳은 생각이었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루마니아 폴란드에 이어 결국에는 프랑스의 톰슨과 르노까지 인수한다"(권영철 전 대우 전무)는 계획.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이 원대한 계획은 그러나 아시아 외환위기, 러시아 모라토리엄 위기가 겹치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마치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이 진군과 정복에서는 타고난 영웅이었지만 제국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일순에 무너져 내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도전
미국이 김우중의 세계경영을 좋게 보지 않았다는 것은 정설이다.
외환위기 이후 IMF(국제통화기금)가 우리 정부에 손봐야 할 한국 대기업으로 대우를 지목했다는 설까지 나돌았을 정도다.
냉전 붕괴의 과실을 김 회장이 따먹으려 달려든 '죄과'였다.
김우중의 동구권 진출방식은 공장 한 두 개를 짓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부흥계획을 통째로 들고 들어가는 패키지 방식이었다.
GM과 마찰도 문제였다.
합작관계가 유지되던 89년 김 회장은 GM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스즈키를 끌어들여 창원 경자동차공장을 세웠다.
92년에는 GM을 몰아내고 대우차 경영권을 장악했고 폴란드FSO와 우크라이나 공장 인수전에서도 GM을 눌렀다.
미국이 적성국가로 분류한 리비아와 이란에도 버젓이 공장을 지었다.
◇ 방랑자
김 회장은 1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냈다.
시쳇말로 역마살이 끼었다.
지금은 그나마도 도피자 신세다.
외국 친구들이 그의 생활을 돌봐준다고 한다.
그는 지금 한적한 시골에서 회고록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회고한다는 것은 앞만 보고 달려나간 김 회장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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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취재팀=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