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골프 뒷얘기]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9.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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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금강CC 캐디마스터 길미희씨는 95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전담 캐디였다.
길씨는 정 명예회장과 카트를 함께 타고 다니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정 명예회장은 길씨에게 "나도 가난하게 살았다.그 가난을 벗어나 잘 살고 싶어 서울로 올라왔다"며 격려하곤 했다.
그늘집을 나오면 매번 길씨에게 "밥 먹었느냐" "뭐 마셨느냐"며 자상하게 배려했다.
또 길씨가 "회장님은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여기 소머리국밥이 맛있다"고 했다.
현 금강CC 경기과장인 진광식씨는 매주 일요일이 되면 정 명예회장을 위한 티오프시간을 관리하곤 했다.
보통 오전 7∼8시에 정 명예회장이 라운드할 수 있도록 앞팀과 뒤팀의 시간을 조정하는 일을 했다.
대선 이후 건강이 악화된 정 명예회장은 9홀을 채 돌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5번홀을 마치고 그늘집에서 잠시 쉬다가 돌아오곤 했다.
뇌졸중으로 몸 한쪽이 마비증세가 와 볼을 제대로 못칠 정도였으니 정상적인 라운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명예회장은 골프장에 나오는 그 자체를 무척 좋아했다.
정 명예회장은 티샷뿐만 아니라 세컨드샷도 길씨가 고무티 위에 볼을 올려주면 쳤다.
아이언은 그린 주변에서 어프로치할 때만 쓰고 드라이버와 우드를 주로 사용했다.
그린에서도 퍼팅을 딱 한번씩만 했다.
정 명예회장이 마지막으로 라운드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이때도 9홀을 채 돌지 못했다.
4번홀을 끝내고 5번홀 티샷이 끝나자 "춥다"며 라운드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
이 날을 끝으로 정 명예회장은 더 이상 라운드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 명예회장은 한번 더 골프장을 찾았다.
지난해 11월.운명하기 4개월 전이었다.
이날은 월요일로 휴장일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았다.
갑작스레 도착한 정 명예회장은 코스를 돌고 싶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 승용차에서 내릴 수가 없어 차를 탄 채로 코스를 돌았다.
진 과장이 골프카로 정 명예회장이 탄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앞에서 인도했다.
정 명예회장은 차안에서 1번홀부터 9번홀까지 쭉 돌았다.
길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골프장에 오셔서 마중을 나가니까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안에서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셨어요.제가 맞나 안맞나 확인하시는 것 같았어요.코스를 돌고 온 뒤 귀가하실 때도 입구에 제가 서 있으니까 차를 멈추게 하더니 계속 저를 주시하다가 가셨지요.무슨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
◇도움말=진광식 금강CC 경기과장.길미희 금강CC 캐디마스터
※다음주부터는 고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의 이야기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