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리더십-부시 前 美대통령과의 대화] (기고) '내가 본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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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홍주
1991년 3월 내가 주미대사로 부임,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을 때 부쉬 대통령은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여세로 90%를 넘는 미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채 안된 1992년 11월, 부시 대통령의 높았던 인기는 어디론지 간데없이 되고 대통령 선거는 '클린턴'의 승리로 끝났다.
부시 전 대통령이 1994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어떤 한국측 인사가 지난번 선거에서의 패인(敗因)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부시 대통령은 첫째는 뉴욕타임스 등 진보적 언론매체의 편파적 공격 때문이었으며, 둘째로는 역시 자신이 국민과의 교감(交感),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레이건 대통령이었더라면 1993년부터는 미국경제가 회복된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불어넣어 선거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으나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노라고 솔직히 털어놓은 것이다.
사실 부시 대통령의 화려한 학력이나 경력에 비추어 보면 그는 분명코 클린턴과 같은 달변은 아니다.
그의 어색한 표현,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은 시사평론가, 토크쇼 진행자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그러나 달변이 아닌만큼 그의 말에는 진실ㆍ성실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인간 부시의 장점, 지나칠 정도로 소박하고 점잖음은 정치인 부시의 약점으로 작용했다.
선거운동 기간 중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의 하나도 이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운동을 같이 해보면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부시의 성품은 테니스를 할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
1991년 7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국빈방문 때 백악관 코트에서 양국 대통령, 필자와 도널드 그레그 당시 주한미국대사 등 4명의 복식게임은 한.미 정상회담 역사상 첫번째 이기도 했지만, 부시 대통령의 소탈함(백악관에는 공을 주어다 바치는 볼보이가 없었다)과 무엇이든 빨리 끝내려고 하는 조바심(첫 세트가 끝나자 숨돌릴 틈도 없이 두번째 세트로 들어가자고 재촉)이 숨김없이 드러난 데서도 기억할 만했다.
부시의 가족사랑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현모양처이면서도 때로는 엄한 모습을 보이는 바버라 부시 여사와의 사이에 둔 자녀와 손자, 손녀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선거기간 중이나 그후에도 미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흔히 재선에 실패한 부시 전 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인간적 접근에 의해서 이루어진 정상들과의 친분에 힘입어 이라크 침공에 대한 다국적군을 조직,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고 동서독 통일과정이 역사의 순리에 따라 이루어 지도록 유도하며, 소련의 종말을 성공적으로 관리해 나간 공적만으로도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라는데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