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떠날 것들 다 떠난 빈 들에... ..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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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것들이 다 떠난 빈 들은 아름답다.
나는 해가 뜨기 전의 이른 아침 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는 빈 들을 좋아한다.
서리를 밟으며 빈 들을 걷는 아침,입에서는 하얗게 김이 난다.
싸늘하게 와 닿는 차가운 공기는 사람을 정신 번쩍 차리게 한다.
빈 논에는 지푸라기들이 서리를 쓰고 누워 있고,드문드문 트랙터 바퀴자국이 패여 있다.
들판 건너 마을 안에는 노랗게 단풍이 든 은행나무가 마을을 풍요롭게 그려내고 있다.아직 죽지 않은 파란 쑥들이 서리를 쓰고 있는 논두렁을 걷다가 논바닥에 있는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간다.아무 데로 가도 길이 된다. 조금 있으면 저 동산 너머로 햇살이 이 들을 찾아오리라.
올해 만큼 농민들의 마음을 허탈하게 한 해도 없었을 것이다.
논과 밭과 산에 오곡백과가 익어가도 농부들의 마음은 무겁고 심란했다.
황금벌판을 이룬 들을 보며 나는 너무 괴로웠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들판이 되면 무엇하나.
나이 드신 농부들이 나락을 길가에 널어 말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괴로웠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겨레의 밥상을 책임지고 뼛골이 다 빠지고,허리가 굽을 때까지 땅을 파며 살았어도 농민들은 한때를 보지 못한 채 저렇듯 이 땅에서 늙어만 가는 것이다.
이 땅의 농부들이 애써 농사를 지어 마당 가득 곡식을 쌓아 놓고 언제 한번 마음 흐뭇하게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평생을 나라가 가르치는 대로,나라가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일 했지만,언제 나라가 한번이나 저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달래주었던 적이 있었던가.
농민들은 오히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역사로부터 버림만 받고 살아왔다.
저 굽은 허리,저 주름진 얼굴들,눈물도 메말라버린 것 같은 모진 세월의 눈자위…. 농민들의 일생은 나를 눈물나게 한다.
농민들의 삶이 망가지면서 우리들의 정신도 망가지고 있다.
허리를 굽혀 땅을 파고 씨앗을 뿌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 결실을 맺는 그 길고 긴 기다림과 정성은 우리 정신,우리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커다란 정서적 역할을 해왔다.
농민들의 일상은 느리고 더디며,오래 기다려야 한다.
곡식의 씨를 뿌려 놓고 기다려야 싹이 난다.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동안이 짧아야 몇개월이다.
그 세월을 기다림으로써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그 긴 시간의 견딤은 사람을 아름답고도 넉넉하게 성숙시킨다.
금방 투자해서 금방 그 결과가 나타나야만 하는 우리들의 이 바쁜 일상이 도대체 우리들의 삶을 그 얼마나 만족하고 행복하게 하는가.
늘 긴장하고,초조하고,누군가를 이겨야만 하는 우리들의 일상.그래서 순간 순간을 모면하려는 찰나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 정신차릴 수 없는 삶을 바로잡아줄 어떤 중심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우리들의 앞날은 불안의 연속인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학교로 들어선다.
아이들의 까만 머리통을 보면 즐겁다.
운동장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 반 1학년은 4명인데,그 중에 2명이 글자를 모르고 학교엘 들어왔다.그들과 보낸 1년은 행복했다.아이들은 '나무'라고 가르치면'나무'라고 배워 익혔다.
글자로 써보라고 하면 쓰고,그것을 읽어보라고 하면 읽었다.무엇을 가르치면 아이들은 그걸 그대로 알았던 것이다. 나는 1학년 학생들과 공 차며 놀고,일기를 쓰게 하고,산과 나무와 꽃과 강과 비와 바람과 곡식과 과일들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은 곧 배우는 일이어서 나도 세상의 사물들을 새로 배우곤 했다.
내가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겠는가.
나는 몇명 안 되는 아이들에게 사람의 소중함을 가르친다.
세상이 아무리 발달하고 인간의 일을 기계가 한다고 해도 그 속에 인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을 가르치는 일도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과 같아야 한다.
기다리고,견디고,참고,정성을 다해야 한다.
운동장과 빈 들에 11월의 햇살이 환하게 깔리고 있다.
아름답고 고운 우리의 산천이 저기 가만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