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2001 기억과 재생展' .. 정규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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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걷다보면 언젠가 이곳에 한번 와봤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조용한 골목에 뭔가의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다는 어렴풋한 기억의 재생 말이다.
이때 우리는 발을 멈추고 이 당혹스런 기억의 뿌리를 더듬게 된다.
주로 사춘기 에 많이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데자부(dejavu)라고 부른다.
'이미 경험한 일'이라는 뜻의 프랑스말.
길거리를 메운 수많은 사람중 거의 70%가 이런 현상을 경험한다니 한 두 사람의 사적인 인식(認識) 오류만은 아니다.
새삼스레 사춘기 심리현상을 거론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이동'이며 '동어반복'이며 '공간의 동일성'이 전사회적 전국가적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다.
신문에 등장하는 낯익은 사진들이며 굵은 활자들이 대부분 수년전 사건들의 재생으로 채워진다.
지난주 막을 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를 전후해 국내에서 일어난 일은 7년전의 반복이다.농민들은 또다시 여의도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농업당국은 그들에 편승해 또 수십조원의 특별예산을 얻어낼 기세다.
7년전 우루과이라운드 당시에 보았던 장면의 판에 박은 리바이벌.
그 다음 사태전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국회에서 밀고당긴 끝에 또 '특별'이라는 말이 붙은 뭔가를 만들어 내고 그것도 안되면 더욱 강력한 아침밥 먹기 운동을 다시 벌이면 된다.
이 비만의 시대에 웬 밥 더먹기 운동이냐지만 어쩌면 내년부터는 전국민이 아침밥을 두 그릇씩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농특세까지 합치면 이미 들어간 돈만도 57조원이다.
이번엔 또 얼마를 더 내야 할지 알 수 없다.
사실 '운동'에는 이력이 난 국민이다.
금모으기 운동에서 주식 안팔기 운동,주식 더 사모으기 운동이 한바탕 지나갔다.
재벌개혁도 운동처럼 지나갔고 언론개혁도 장대 끝에 매달린 운동회의 깃발 아래 한차례 홍역을 치러냈다.잊지도 않고 또 찾아온 장면에는 고위 경제관료들이 전국을 누비며 강연회를 연다는 지난주 재정경제부의 발표도 들어 있다.
1997년 가을의 우스꽝스런 강연시리즈조차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차라리 이 나라의 국민된 것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길거리로 나서야 하는 장관들의 딱한 모양새는 5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정치조차 길거리 집회를 하지말자는 터에 경제장관들의 길거리 강연회는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KDI가 '비전 2011'이라는 제목으로 거창한 세미나를 갖는 것도 낡은 기억의 창고에서 또 한장의 사진을 꺼내 먼지를 털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강경식 전 부총리가 난데없이 '21세기 국가과제'를 들고 뛰었던 외환위기의 97년과 너무도 똑같이 재생되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진념 부총리 같은 현실론자조차 "국가비전을 세우겠다"며 KDI를 들볶고 있으니 고위 관료들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왕조시대 관료상의 미몽을 헤맬 뿐이다.
경천애민(敬天愛民)하는 관료 이상국가론은 잘못된 권위주의 정치보다 더욱 시대착오적이다.
집권당의 총재직조차 벗어버린 김대중 대통령이 '개혁만이 살 길'을 강조하는 것도 실은 '동어반복'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보 기아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왜 시장경제라는 말만 나오면 문제가 터지냐"며 화를 냈다지만 개혁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개혁이 헛기침 소리를 내며 돌아앉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장을 개혁하되 시장을 알지 못하고,개혁을 추구하되 개혁을 알지 못하면 다만 공허한 구호만 남게 된다.
밤새도록 먼길을 걸었지만 아침에 보면 결국 제자리였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운명을 우리는 언제쯤 벗어던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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