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아시아경제'] (5.끝) '말레이시아의 도전'

말레이시아 최대의 건설.엔지니어링 회사인 레농그룹. 이 회사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할림 사드 회장이 지난 10월 전격 사임했다. 레농이 65억달러의 빚더미에 올라 앉는 등 경영부실의 골이 깊어진데 대한 인책사퇴였다. 이 회사는 3년 전부터 부채원금은 커녕 이자도 갚지 못할 정도로 재무구조가 엉망이다. 할림 회장의 무능하고도 방만한 경영이 주 원인으로 지적됐지만 그는 언제나 건재했다. 집권 말레이국민기구연합(UMNO)의 실력자인 그를 대놓고 건드릴 사람은 마하티르 모하메드 총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우외환(內憂外患)-. 말레이시아 경제 상황을 전문가들은 이렇게 요약한다. 이 나라 경제는 지난 3.4분기 성장률이 전년동기 대비 마이너스 1.3%로 뒷걸음질치는 등 몸살을 앓고 있다. 1분기와 2분기 성장률은 각각 3.1%와 0.5%의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갈수록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진 대외적 요인은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 등 주변 국가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미국 등 선진국 시장의 침체에다 이 나라 주력산업인 전자 등 IT(정보기술)산업의 불황까지 겹친 것이 최대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기준으로 미국 및 일본에 대한 수출이 각각 GDP의 23.5%, 12.4%를 차지했을 정도로 특정 해외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 말레이시아 국가경제실행위원회(NEAC)의 무스타파 모하메드 사무총장(전 재무장관)은 "수출품 가운데 50% 가량이 전자제품으로 구성돼 있을만큼 품목 편중도 또한 높은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내우'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부실 금융회사와 기업들에 대한 '미완'의 구조조정으로 경제 전반의 체력이 현격히 저하됐다는 것. 마하티르 총리가 측근이었던 할림 레농그룹 회장을 축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기업 부실문제는 심각하다. 말레이시아 경제에 불안을 느낀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면서 작년 4월 3백3억달러까지 늘어났던 외환보유액이 최근 2백억달러대 초반으로 뚝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말레이시아 경제가 이런 난관에 부딪친 원인을 1997∼98년 외환위기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기도 한다. 마하티르 정부는 외환위기 초기 미국과 IMF(국제통화기금)의 처방을 받아들여 고금리.긴축재정 등의 긴급 조치를 도입했지만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는 등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98년 9월 전격 도입한 '자력 회복대책'은 고정 환율제 도입을 통한 외환통제와 저금리.경기부양 등이 골자였다. 금융·자본시장의 전면 개방을 권고한 IMF의 처방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 세계적 논란을 일으켰지만 말레이시아 경제는 99년 5.8% 성장으로 회복 가능성을 보인데 이어 작년에도 8.5% 성장하는 등 양호한 성적표를 냈다. 마하티르 정부에 '자력 회생'의 가능성은 축복이자 또다른 시험이 됐다. 경제 운영에 지나친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친정부 인사들이 이끄는 대형 부실기업들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숙제'를 소홀히 해버린 것.그러나 최근 들어선 말레이시아 경제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부패한 정경유착의 고리'에 대한 대내외 비판이 높아지자 마하티르 정부는 레농그룹 경영진을 교체한데 이어 최근 역시 정치권 실세와 연줄을 대고 있는 IT지주회사 테크놀로지 리소시스사의 회장을 경질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또 오는 2020년까지 5백억링기트(약 17조5천억원)를 투입, 말레이시아를 IT 선진국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멀티미디어 슈퍼코리도(MSC)'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확고한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윤수영 말레이시아 주재 상무관은 "마하티르 총리는 말레이시아의 소수 종족인 인도계라는 점에서 정치적 핸디캡이 있다"며 "그러나 명료한 비전과 세심한 디자인,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확고해 또 한번의 위기 극복을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콸라룸푸르=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