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25) '법흥(송광사 회주)'

조계산 자락에 새 둥지처럼 자리 잡은 송광사의 겨울 풍경이 아늑하다.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윗길로 조금 오르자 화엄전이다. 관광객의 출입을 막기 위해 걸어놓은 빗장을 풀고 들어섰다. 화엄전의 왼편 구석에 "방우산방(放牛山房)"이라 쓴 현판이 걸린 방 앞에 털신과 고무신이 한켤레씩 놓였다. 인기척을 내자 "서울에서 왔소?"라며 노승이 문을 열어 준다. 송광사 회주 법흥 스님(法興.71)이다. 노장은 마침 글씨를 쓰던 참이다. 올해 송광사 달력 뒷표지에 있는 "걸림없이 살 줄 알라"는 글을 세필로 옮기다 객을 맞는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잡보장경(雜寶藏經)의 내용인데 한마디 한마디가 금과옥조다. "신도와 스님들이 써달라고 해서 써봤더니 한 줄이 빠졌어요. 그래서 다시 썼더니 이번엔 두 줄이 빠졌네요. 그 참…" 노장이 멋적게 웃는다. 법흥 스님은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이듬해인 1959년 효봉 스님을 은사로 대구 동화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당시 효봉 스님은 "얼굴이 중 상(相)인데 어째 이제까지 속가에 있었느냐"며 제자로 거두었다고 했다. 스물아홉 늦깎이였으니 그럴만도 했겠다. 그로부터 43년.효봉 스님 상좌로는 이제 법정 스님과 법흥 스님 둘만 남았다. "효봉 스님은 성품이 아주 너그럽고 원만해서 남들이 다투고 시비하는 걸 보면 ''중생계는 항상 그래.까짓것 싸워 이겨서 뭘해''라며 웃어버리곤 하셨지요" 그러나 정진의 용맹심 만큼은 지독했던 효봉 스님이다. 제자들이 그런 가풍을 이은 것은 당연하다. 법흥 스님도 ''무자(無字)화두''를 들고 오대산 상월사,도봉산 망월사,문경 김용사 금선대,묘관음사,통도사·해인사·송광사 선원 등을 두루 거쳤다. 지금도 방에서 좌복을 깔고 참선에 든다. "준동함령(蠢動含靈·꿈틀거리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왜 조주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여기에 의심이 걸려야지요. 여기서 없다는 건 유무(有無)의 무가 아닙니다. 참선은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게 맞지 않아요. 논리는 분석인 반면 선은 정신집중이고 공안(화두)에 대한 의심입니다. 덮어놓고 의심해야 합니다" 노장은 "번뇌를 끊는 제일 빠른 방법이 화두에 대한 정신집중"이라며 참선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중국 곽암선사의 십우도(十牛圖)로 설명해준다. 처음 소를 찾으러 나서는 심우(尋牛)로부터 깨달음의 열매를 중생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저잣거리에 나서는 입전수수(入廛垂手)에 이르기까지 10단계 선(禪)의 심법(心法)이다. "깨치고 보면 유록화홍(柳綠花紅)이라,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으니 우주자연의 본래 면목이 그대로 보이지요. 성철 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도 그런 경지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는 성불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겁니다" 육신은 나고 죽음이 있지만 청정한 마음자리,즉 육신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생멸(生滅)이 없다고 법흥 스님은 말한다. 참선을 통해 마음을 깨닫고 나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를 발견하게 되고 생사가 해탈돼 가고 옴을 마음대로 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고통과 번뇌를 끊어서 내 마음이 즐거우면 바로 극락이요,내 마음이 괴로워서 살 수 없으면 지옥입니다. 돈이 많거나 절에 시주를 많이 해서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번뇌를 끊어야 갈 수 있어요. 지옥과 천당은 마음 쓰기에 달린 것이니 자작자수(自作自受·스스로 지어 스스로 받음)지요" 어떻게 살아야 극락에 갈 수 있을까. 노장은 세가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일러준다. 깨끗한 마음(청정심)과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무섭도록 정진하는 용맹심이다. "중국의 임제 스님은 청정심이 곧 부처(淸淨心是佛)라고 했습니다. 일월(日月)같고 청풍명월같은 광명정대한 마음을 가져야 돼요. 그래야 부귀와 재물,권력과 무력에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지요. 또 부처님과 나라와 부모님과 스승 그리고 뭇 중생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용맹심의 사례로는 다시 효봉 스님이 거론된다. 서른여덟에 늦깎이로 출가한 효봉 스님은 장좌불와(長坐不臥)할 때 엉덩이에 진물이 나 방석이 달라붙을 정도로 정진했다는 것.법구경의 말씀을 하나 소개해달라고 하자 이런 말씀을 들려준다.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고통을 받고,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나쁜 사람도 즐거움을 받는다. 그러나 선악의 열매가 다 익으면 착한 사람은 즐거움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착한 일,악한 일을 한 결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지은 만큼 받게 되는 것이 인과법이라는 설명이다. 2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법흥 스님은 법화경,법구경,아함경 등 여러경전의 말씀과 조사들의 선어록 등을 두루 인용하며 중생을 깨우치려 애썼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글씨 하나 드릴까"라며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내놓는다. ''凡所有相 皆是虛妄(범소유상 개시허망·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깨달음을 보리라)…'' 스님은 고희를 넘었어도 아직 손수 빨래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책이며 글씨를 나눠준다. 현판에 쓰인 방우(放牛·자유로운 소라는 뜻)처럼 걸림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송광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