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설날이 여느 날과 다른 것은 .. 黃鉉産 <문학평론가>

黃鉉産 우리 고향에서만 쓰던 속담인지 모르지만, '섣달이 둘이라도 시원치 않다'는 말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신정에 차례를 지내게 하자 어느 날을 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정황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우리 집에서도 단 한 번뿐이지만 신정에 차례를 지낸 적이 있다. 신식교육을 받은 자식들의 강권으로 양력 섣달 그믐날 밤에 차례를 준비하던 어머니가 마침 창밖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섣달 그믐에 달이 뜨다니 이게 무슨 변고냐. 보름날에 설상을 차릴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이후 다시 음력설로 돌아갔다. 우리가 우리의 근육을 팔다리의 그것처럼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수의근과, 내장의 그것처럼 내 의지에 따르지 않는 불수의근(不隨意筋)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듯이, 사람의 기억도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수학공식이나 법조문, 거래처의 전화번호를 애써 외워 두고는 필요할 때마다 불러내 사용한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기억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이런 수의적 기억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더 많은 기억들이 쌓여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댁 뒤란에서 보았던 뱀, 어느 골목에서 맡았던 음식 냄새, 제사상을 밝히던 은성한 촛불과 얼룩진 병풍, 나는 이런 것들을 애써 외워 둔 적이 없지만 그 기억들은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가 어떤 계기를 얻어 마치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처럼 눈 앞에 선히 떠오른다. 며칠 전에도 아들이 입대문제를 의논해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국민학교 때 참새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새는 어떻게 되었던가, 누가 잡았던가, 창문 밖으로 다시 날아갔던가. 아들은 정신이 딴데 가 있는 내 얼굴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불수의적 기억들은 때때로 사람들을 이렇게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나를 걷잡을 수 없이 달뜨게도 하고, 느닷없이 습격해 나를 고통스럽게도 하는 이 기억들이야말로 내가 이 몸을 지니고 사는 동안 세상 만물과 깊이 사귀어 온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설은 바로 이 이상한 기억들을 위해 마련된 날이다. 누구나 읽었을 '어린 왕자'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의례'란 무엇이냐고 묻자, '의례란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하고,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우는 대답한다. 설날은 여느 날과 다른 날이다. 정성을 들여 마련한 음식들, 따뜻한 방과 다정한 말들, 갑자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밤 하늘, 차례상 앞에서 식욕을 누르는 아이의 인내심, 그리고 특히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산다 하더라도 삶의 뿌리가 어느 깊은 곳에 뻗어 있다고 다시 믿게 되는 사람들의 엄숙한 얼굴,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 이 날을 여느 날과 다르게 만든다. 이 날 찾아 온다는 귀신들은 내가 살아오며 이 땅과 맺은 관계들이며, 내 생애를 넘어서서 내가 핏줄로 이어받은 조상 대대의 온갖 기억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내 무의식 속에 녹아 있다. 농부들은 설날에서 대보름을 지나 정월이 끝나는 날까지 소에도 사람의 옷을 입히고 농기구들에도 말을 건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지어오며 사람들이 그것들에 쌓아 놓은 무의식과 만나는 것이며,제 깊은 뿌리와 말을 나누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우리의 몸 속에 녹아 있는 묵은 기억들이 귀신으로 되어 찾아오는 날을 법과 제도가 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기억들과 함께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 새겨진 오랜 습관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설날이 있고 두 가지 시간이 있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한, 주기와 비교적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양력의 시간이 있고, 달의 신비로운 변화를 인간의 정서 속에 안아들인 음력의 시간이 있다.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내 한 해는 양력설에 시작한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내 한 해는 또 다른 정월의 첫날, 바로 이 설날에 시작한다. 나는 이 날 나를 키워준 모든 것들, 이제는 내 삶의 반경에서 멀어졌으나 실제로는 내 몸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 두 개의 설이 내 표면의 삶과 내 뿌리의 삶 사이에서 내 정신의 균형을 잡아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