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협상전선] (15) 뒷북 친 어업협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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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의장 안팎에서 여야 의원간 욕설과 몸싸움이 한창이던 지난 99년 1월6일.
한.일 신어업협정 비준동의안은 국회에서 이렇다할 토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채 여당의 날치기로 단숨에 통과됐다.
정부는 한달 전인 98년 12월 초에야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공개했다.
시간이 걸리는 복잡한 토론을 원천봉쇄한 셈이었다.
3개월 전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訪日)로 한껏 무르익어가는 양국 화해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충정의 발로이기도 했다.
국회 통과 일등 공신이었던 외교통상부 관계자들은 청와대로부터 축하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국 어업협상 최대의 실패작으로 꼽히는 한.일 쌍끌이 협상은 이렇듯 축제 분위기 속에 시작됐다.
1개월 후에 재개된 실무협상이 최대의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피해 어민들이 해양수산부에 들어닥치면서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우선 대형기선저인망 업종의 주력 선단이던 쌍끌이 선단 2백50여척이 일본측 수역 입어대상에서 제외됐음이 드러났다.
연간 3천억원의 어획고를 올리는 주력 선단이 조업할 수 없게 된 것.
냉동오징어와 활오징어의 조업기간 협상에서는 성어기인 3∼6월이 누락됐다.
정부는 오징어잡이 시기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상에 나섰음이 드러났다.
이로써 부산 경남지역 2백여척이 조업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김영규 어업자원국장은 "일본에서 치어 보호기간을 요구함에 따라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비난의 화살은 해양수산부로 집중됐다.
다급해진 해양수산부는 협상을 체결한 지 한 달도 채 안돼 일본측에 재협상을 요구해야 했다.
한국의 국제 신뢰도는 내동댕이쳐졌다.
김선길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의 돌출 행동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일본 농수산 장관과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잘 풀릴 것이라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가 들어야 했던 말은 "이미 타결된 협상의 틀을 훼손할 수는 없다"는 일본측의 단호한 거절이었다.
외교통상부의 태도 역시 비난의 여지가 많다.
외교부는 문제가 터지면서 협상 테이블에서 슬슬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협상 대표를 선정할 때는 해양부와의 논쟁도 불사하던 외교부였다.
3월8일부터 재개된 쌍끌이 협상과정에서 외교부가 한 일은 우리측 협상대표단의 도쿄 방문 일정을 잡아주는 정도였다.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은 김 전 장관의 갑작스러운 방일에 대해 "장관 본인도 망신이지만 나라 체면이 말이 아니다"며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양 팔짱을 끼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어민보다 체면이 중요하냐는 핀잔을 들었다.
상황은 꼬여만갔다.
쌍끌이 어선 80척이 조업하는 대가로 한국은 일본 복어반두업 어획쿼터를 10배나 늘려주고 말았다.
그나마 쌍끌이 어선의 주어장인 동경 1백27∼1백28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80척 중 10척에 불과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협상을 다시 무리하게 추진하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내부적으로 제기되기도 했지만 잘못 끼어들었다가 욕만 먹을 수 있다는 불호령에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외교부 관계자는 회고했다.
뒤죽박죽에 무책임이 더해진 협상이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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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어업협정 일지 ]
98.1 일본, 어업협정 파기 일방통보
98.3 한.일 외무장관 어업협정 교섭 재개
98.9 새 한.일어업협정 타결
98.10 김대중 대통령 방일 어업협정 가서명
99.1.6 한국 국회 새 협정 비준 동의
99.2.5 한.일 어업협정 실무 협상 타결
99.2.5이후 쌍끌이 복어채낚기 누락 발견
99.3.11 김선김 해양수산부 장관 긴급 방일
99.3.17 추가협상 타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