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협상전선] (16) 뒷북 친 어업협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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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9년 4월 제2차 어업공동위 준비실무위원회.
과장급 정도가 참여하는 극히 실무적인 자리였지만 한국측 대표들은 중국의 뜻밖의 주장에 맞대응하느라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중국은 한국 어선에 대해 양쯔강 하구 수역 조업을 일년 내내 금지하겠다는 느닷없는 주장을 내놨다.
불과 한달 전 굴욕적인 쌍끌이 협상으로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받았던 당국으로서는 또 하나의 악재.
뒤통수를 맞은 한·중어업협상의 근원은 5개월 전인 98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정부는 어업부문 협상에도 박차를 가했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협상 책임자들의 강박관념은 어업협상 양해각서의 가서명까지 만들어 내기는 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수역 구획과 관련, '상대국 국내법 준수'라는 불명확한 조항이 별다른 검토없이 각서에 포함됐다.
당초 한국측은 양쯔강 하구 수역에 적용될 중국 법령이 중국 연안쪽으로만 우리 조업을 금지하고 바깥 수역에 대해선 연간 3개월의 금어(禁漁)기간을 제외하곤 조업을 허용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그러니 정확한 구역 획정을 요구하지도 않았었다.
우선 자국 어민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중국측의 고민을 배려했다.
또 북위 37도 이북 특정 금지 수역에서 조업을 않겠다는 중국에 대해 자발적으로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했다.
결국 양국의 조업 수역을 확실히 긋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법을 준수한다'는 애매한 조항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러나 중국은 한국 정부의 우호적이고도 안일한 대처를 자국의 이익에 적절히 이용하는 역습을 가해왔다.
양해각서에 가서명한 뒤 바로 법령 개정 작업에 착수, 99년 3월 양쯔강 하구에서 우리의 쌍끌이.통발.안강망 어선 등 1백5척의 조업을 금지시켜 버렸다.
조기 갈치 꽃게잡이가 즉각 타격을 받을 노릇.
한국 정부는 "각서에 가서명한 후 법령을 개정하는 것은 무효"라며 펄쩍 뛰었다.
또 가서명 당시 "우리 어민들에게 불리한 법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중국측이 구두(口頭)로 합의했다는 점을 들어 신의성실 원칙에 어긋난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중국측은 꿈쩍도 안했다.
오히려 가서명 때 '주의 의무'를 기울이지 않은 한국의 항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구두약속을 근거로 한 우리 정부의 항의는 졸지에 구차한 구걸로 전락하게 됐다.
게다가 당시 흑산도 수역 등 우리 연안에 새까맣게 몰려오기 시작한 중국어선들은 한국측의 협상 여지를 좁혀왔다.
결국 한.중어업협상은 양해각서 가서명 후 2년여의 지지부진한 진전 끝에 사실상 중국의 의도대로 귀결됐다.
중국은 양해각서 가서명 당시부터 조업을 포기한 한국의 특정금지구역을 새삼스러운 카드로 활용해 한국 정부로부터 양쯔강 하구 연안에서 단계적으로 떠나겠다는 항복의사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도 주위의 곱지않은 시선이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양쯔강 연안 한국 어선에 대한 조업금지 조치는 한.일어업협상 후 중국 내부적으로 평등조항에 대한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며 우리측의 합의사항을 뒤집은 어처구니 없는 조치였다"는 해양수산부 관계자의 토로.
하지만 한국해양대 사회과학연구소 김영구 교수는 "일본은 법 체계와 정서가 한국과 비슷해 협상이 쉽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를 뿐더러 대외 협상에서 이른바 '계산된 모호성 정책'을 고수한다"며 "양해각서의 의도를 아직까지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딱할 따름"이라고 지적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