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보드카

앙드레 지드는 "러시아의 소설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빼면 관절 빠진 손목과 손가락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리키 등의 소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드카는 약방의 감초격으로 등장한다. 먼 방랑의 길을 떠날 때,독설을 품어낼 때,사회적인 부조리를 토로할 때 마시는 보드카는 으레 소설속의 국면을 반전시키거나 부각시키는 장식용으로 쓰였다. 보드카가 러시아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작품들의 영향이 큰 듯 싶다. 또 이 나라의 춥고 우중충한 기후와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스산한 사회분위기도 보드카라는 독주와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고 있기도 하다. 아직도 러시아 사람들은 보드카를 너무 사랑한다. 마누라와 빵 없이는 살 수 있을지언정 보드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할 정도이다. 심지어는 가정상비약으로도 보드카를 애용한다. 감기에 걸리면 후추를 섞고,배가 아프면 소금을 타서 마신다. 최근 들어서는 이같은 습관적인 음주와 경제난까지 겹쳐 보드카의 폐해가 부쩍 심각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며칠전 오니슈첸코 러시아 보건차관은 지난해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4만7천여명으로 불과 1년전에 비해 15배나 급증,국가안보까지도 위협할 지경이라고 언급했다. 각종 사고의 40%도 술 때문이었다는 설명이고 보면,음주문제는 이미 도를 넘어선 것 같다. 하기야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조차도 아일랜드 방문중 기내에서 보드카에 취해 정상회담을 연기한 적이 있고,한 겨울에 보드카를 마시다 맘에 안든 보좌관을 모스크바강에 빠뜨리라는 지시를 할 지경이니 민중들의 음주벽은 오죽하랴 하는 생각이다. 15세기께부터 보드카를 즐겨 마신 러시아인들이 당장 절주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90년대 초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의 걸림돌로 과음을 지적하고 여러 조치를 내렸지만 실패로 끝난 게 단적인 예이다. 뿌리 깊은 러시아인들의 음주행태가 잇따른 '경고'로 어떻게 달라질지 두고볼 일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