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동 전문기자의 '유통 나들목'] 商道와 人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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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시대의 거상 호설암(胡雪岩).
춘추전국시대의 여불위(呂不韋)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양대 거상으로 손꼽히는 호설암(1823∼1885년)은 청조에서 유일한 홍정(紅頂) 상인이었다.
홍정은 1∼2품의 고급관리로 모자의 상단을 붉은 산호로 장식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귀의 상징이 바로 홍정이었던 것.
호설암은 안후이성의 한 농촌이 고향이다.
가난 탓에 독학으로 문필을 깨우치고 친척이 운영하는 환전상(소규모 금융기관)에서 일했다.
그가 거상으로 발돋움한 계기는 절강성 순무(巡撫,지방장관)를 지낸 왕유령(王有齡),좌종당(左宗棠)과의 만남이었다.
호설암은 왕유령이 항저우에서 낭인 신세로 전전할 때부터 그를 도왔다.
기백이 출중한 왕유령에게 호설암은 은자 5백냥을 선뜻 빌려줘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마침내 절강성에서 최고 지위에 오른 왕유령은 군량미와 병기 납품을 호설암에게 맡겼다.
이로써 관상(官商)의 입지를 탄탄히 굳힐 수 있었다.
정치가 좌종당과는 1862년 처음 대면했다.
그후 20여년 동안 그를 도왔다.
이 시기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서구 열강이 중국을 침탈하는 등 격동의 세월이 이어졌지만 호설암과 좌종당의 신의는 한결같았다.
1882년 호설암은 생사(生絲)시장을 외국인의 손에서 다시 빼앗기 위해 전재산 2천만냥을 털어 생사를 사들였다.
이에 외국상인들이 담합,호설암의 생사를 외면하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고 재고를 처분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수해나 가뭄 구호를 위해 20만냥을 중국 각지에 내려보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민족적 자부심과 존경심을 느꼈다.
그는 "군자는 재물을 좋아하되 반드시 도(道)에서 이를 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임상옥(1779∼1855)이란 거상이 있었다.
그의 장사철학은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이란 말에 함축돼있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곧기가 저울대와 같다'는 의미다.
상도(商道) 역시 인도(人道)와 다를 게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거상의 풍모와 철학에는 아무래도 공통점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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