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왜 강한가] (13) '재고관리' .. 생산~판매 時差 최소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경기가 어려운 데도 양호한 실적을 낸 것은 재고와 부실채권을 적게 유지한 덕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반도체나 통신업체들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재고를 많이 갖고 있다가 가격변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발주에서 구매 생산 물류에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하면 상상 이상으로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 부회장의 경영철학 중 하나가 '재고는 백해무익'이라는 것이다. 그는 임원회의를 비롯한 각종 공식 석상에서 '재고는 악'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재고는 백해무익=1998년의 일화. 윤 부회장은 수원 컬러TV 공장을 둘러보다 창고에 물품이 빽빽이 쌓여있는 것을 목격했다. 물건이 달려 못 팔고 있다는 판매담당자의 말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는 즉시 공장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판매와 생산부문 간에 정보 흐름이 막혀 재고 파악이 실시간으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기한은 재고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컬러TV 생산라인은 한 달 가까이 가동이 중단됐다. 이상렬 경영지원총괄 상무(경영혁신팀)는 "임원들의 반발이 엄청났지만 윤 부회장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윤 부회장은 재고의 폐해를 이렇게 열거했다. △창고관리비 등 비용부담이 가중되고 △신제품 출시시기가 늦어져 판매 기회 손실이 일어나고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밀어내기 판매를 초래하며 △시장의 반응을 실시간 확인할 수 없어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 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재고관리를 잘하는 회사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미국 PC 메이커 델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델은 전화 주문상담을 할 때 각 품목의 재고량을 체크하면서 상품을 추천할 정도로 재고관리 문화가 전 임직원의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 휴대폰 PC 가전제품에 걸쳐 각기 유통채널이 다른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삼성전자로서는 딱맞는 재고관리 프로그램을 외부에서 찾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델은 PC 전문 메이커여서 유통채널이 단순하기 때문에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SCM 구축=삼성전자는 1999년 PWC를 비롯한 해외 컨설팅사와 삼성SDS 엔지니어들을 불러들였다. 떨어진 임무는 '재고를 없애라'는 것.이들은 현재 어떤 상품이 얼마나 팔리고 있고 앞으로 얼마나 더 팔릴지를 예측해 최대한 빨리 생산라인에 통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회사 전체를 망라하는 것은 물론 어떤 상품도 관리 대상에서 빠뜨려서는 안됐다. 판매와 제조의 동기(同期)화를 실현하는 삼성전자의 방대한 SCM(공급망관리) 시스템은 이렇게 시작됐다. 판매부문에서 현재 어떤 물건이 얼마나 팔리는지,앞으로 얼마나 더 팔릴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공장에 통보하면 제조부문은 이를 토대로 생산계획을 새로 짜는 게 SCM의 골자다. 수요예측은 최대 16주까지다. 이상렬 상무는 "SCM을 구축하고 난 후 한 달마다 새로 짜던 생산량 재조정 작업이 일주일 단위로 호흡이 빨라졌다"며 "그만큼 시장 반응에 빨리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삼성전자 SCM은 전세계 생산과 판매법인을 대상으로 개발에서부터 애프터서비스(AS)까지 전 영역에 걸쳐 있다. 반도체부터 휴대전화까지 모든 품목을 커버한다는 점에서 해외에서도 유례가 없는 규모다. 삼성전자는 올해 안에 SCM을 전세계 판매법인 54개 중 주요 지역 49개와 전세계 생산법인에 정착시킨다는 계획이다. ◆SCM의 성과=SCM은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97년 8주였던 평균 재고 일수가 지난해엔 3주로 줄어들었다. 이상렬 상무는 "3주는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미국 LA까지 배로 실어 날라 유통시장에 풀어놓는데 걸리는 시간"이라며 "제조와 판매간의 시차를 실질적으로 제로로 만들었다고 봐도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항공기로 운송하는 D램과 휴대폰의 경우 평균 재고 일수는 길어야 이틀이다. 재고가 없으니 경쟁사보다 빨리 신제품을 내보낼 수 있게 됐다. 이광성 경영기획팀 상무(정보전략그룹장)는 "휴대폰이 지난해 큰 수익을 낸 비결은 재고관리"라고 말했다. "전세계에 1억대 이상의 휴대폰 재고가 쌓여 다른 선발업체들이 신제품 출시를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재고가 없었던 삼성전자는 재빨리 신제품을 출시해 시장을 잠식했다"는 설명이다. ◆SCM과 ERP의 시너지효과=SCM이 성공적으로 도입된 데는 이에 앞서 구축한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의 뒷받침이 있었다. ERP는 인력 생산재 물류 회계 등 회사의 모든 경영정보를 컴퓨터시스템으로 통합 관리하는 프로그램.1993년부터 지난해까지 만 7년간 총 7천억원이 들어갔다. 해외법인간 네트緇?구축에만 1천억원이 투입됐다. ERP를 사용하고 있던 덕에 전세계 생산과 판매법인은 실시간으로 주요 정보를 주고받고 이를 활용하는 문화에 익숙해졌다. ERP 구축은 현금흐름 개선과 해외법인 부실방지라는 효과도 가져왔다. 현금흐름이 좋아진 이유는 물건을 판 후 다음달 20일에 모아서 결제하던 대리점들이 ERP가 구축된 뒤에는 판매 후 3일 안에 바로바로 이를 결제하게 됐기 때문이다. 또 이전엔 해외법인에서 부실을 숨기거나 늦게 보고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본사가 해외법인의 경영상태를 실시간 파악하게 됨으로써 해외법인이 적자에서 탈피하는 데도 기여했다. ◆뼈대는 외국 소프트웨어,살은 삼성의 노하우=SCM과 ERP는 해외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개념을 확장시키고 삼성 문화에 맞게 재가공했다. 이상렬 상무는 "삼성전자의 SCM은 개발 제조 품질 물류 마케팅 판매 서비스 등 7가지 영역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반도체 PC 휴대폰 가전제품을 한꺼번에 커버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ERP도 마찬가지. 삼성전자는 ERP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미국 SAP에서 수입해 왔지만 삼성SDS 인원 1백여명을 투입,삼성만의 프로그램으로 탈바꿈시켰다. SDS는 이렇게 해서 개발한 한국식 ERP를 상품화해 국내 기업들에 판매하고 있다. 이광성 상무는 "HP나 IBM도 현재 디비전(사업부)별로 운영하고 있을 뿐 전체적인 ERP는 아직 구축단계"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이봉구 산업담당부국장(팀장),강현철,이익원,조주현,김성택,이심기,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