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대통령후보 노무현] 걸어온 길.. 초선때부터 '大權 꿈'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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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후보는 '5공청문회'의 스타로 떠오르던 초선때부터 '대권의 꿈'을 가꾸어왔다.
노 후보는 지난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뒤 그같은 꿈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지역에서 지지기반이 취약한 통합민주당에 소속돼 재기할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노 후보는 그처럼 어려운 국면에 놓인 시기에도 지인들에게 "대권에 도전할 의지가 없다면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며 대권에 강한 의지를 보였었다.
노 후보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지난 93년부터 사재를 털어 인맥을 관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96년께 상업화를 추진할 수 있을 정도로 업그레이드됐다.
◆성장기=노 후보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유난히 키가 작아 '돌콩'으로 불렸다.
학창시절 공부는 제법 잘했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시절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부산상고에서는 5백여명 중 각각 48등,2백18등,59등으로 상위권과 중위권을 오갔다.
그러나 그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반항아였다.
중학생땐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내용의 작문을 거부하다 '역적'이란 소리를 들었다.
부산상고 시절에는 시험시간에 도망을 치거나 술과 담배를 배우기도 했다.
생활기록부에 '지도능력이 있다','정의감이 강하다'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와 '비타협적이고 독선적이다','불안한 거동이 많다'는 부정적 평가가 섞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시합격·법조인 시절=고교졸업 후 어망회사에 취직했으나 한달만에 사직하고 건설현장을 전전하다 68년 입대했다.
71년 군제대와 함께 고시준비를 시작해 75년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준비 중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네마을처녀 권양숙씨와 결혼했다.
고시공부를 할때는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독서대를 개발해 특허출원을 하기도 했다.
노 후보는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1년만에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는 81년 부산지역 학생운동 관련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을 계기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을 맡은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노동변호사로 거듭났다.
87년 9월엔 대우조선 이석규씨의 사인규명에 나섰다가 '3자개입' 등 혐의로 구속돼 변호사업무정지처분까지 받았다.
◆정치역정=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정계에 입문,5공실세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90년 1월 3당 합당 때 '역사적 반역'이라며 김정길 의원 등과 야당의 길을 선택하면서부터 춥고 배고픈 시절이 시작됐다.
92년 14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허삼수 후보와 재대결을 벌였으나 무릎을 꿇었다.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민자당 문정수 후보에게 패했다.
96년 15대 총선에서 종로구에 도전했으나 역시 고배를 들었다.
98년 7월 종로구 보선에서 국민회의 후보로 금배지를 달았으나,2000년 16대 총선에선 '지역구도 극복'을 명분으로 부산 북·강서을구에 출마했다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꺾였다.
정치적으론 위기에 몰렸지만 이를 계기로 최근 '노풍'의 진원지인 온라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결성됐다.
2001년에는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돼 국정 경험을 쌓는 기회를 얻고 여권 대선주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됐다.
윤기동 기자 yoonk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