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이회창] '정치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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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키에 조금 벗겨진 깨끗한 이마 뒤로 정갈하게 머리를 벗어넘긴 이회창 후보.
'법과 원칙이 살아숨쉬는 나라' '반듯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 후보의 정치입문 과정은 어찌보면 '떠밀리 듯' 타의에 의해 이뤄진 측면이 많다.
그러나 정계입문 5년만에 이 후보는 '폴리티컬 베이비'라는 세간의 평가를 불식하고 '이회창식 정치실험'에 앞장서고 있다.
◆ 성장기 =이 후보는 검사출신인 이홍규 옹과 김사순 여사 사이에 4남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발령지에 따라 서너살땐 전남 장흥에서 살았고 이후 광주 서석초등학교, 청주중학교, 경기중학교로 옮겨다녔다.
이 후보는 '검사의 아들로서 온실속 화초처럼 자란 것 아니냐'는 지적에 "'똥지게'도 여러번 져봤고 아버지가 모함으로 구속됐을 때인 17세때는 소년가장이 돼 가족을 부양하면서 주린 배를 찬물로 채웠다"고 답한다.
최근 공개한 중.고 시절 생활기록부를 보면 청주중학에서 경기중학으로 전학한 2학년때는 전체 4백20명중 3백5등을 차지했지만 중3때는 4백25명중 54등을 기록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서울대 법대 4학년(23세)때 사시에 합격했다.
◆ 법조인 시절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대법원판사, 대법관 등 대법원장을 제외한 법조계 요직을 두루 거쳤다.
최연소 대법관 기록을 세우는 등 법관으로서 최고의 경력을 쌓았다.
법관시절 군사정권하에서도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 등에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법관 시절 가장 많은 소수의견(10건)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61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판결에 혁명재판부 심판관으로 참여한 것을 두고 여야간 논란이 분분하다.
◆ 공직시절, 국민적 인사로 =지난 88년 당시 대법관이던 이 후보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이 후보는 89년 동해시 재선거에서 민정, 평민, 민주, 공화 4당의 입후보자 전원을 불법 선거혐의로 고발했다.
그후 4개월 뒤 영등포을 재선거가 결정되자 그는 당시 현직 대통령인 노태우 민정당 총재를 비롯한 각 당 총재들에게 불법선거 운동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는 경고 편지를 보냈다.
두번째 재선거가 끝난 두달 뒤 "부정선거풍토를 막지 못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선관위원장직을 전격 사퇴했다.
93년 문민정부 등장과 함께 감사원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감사원장 공관입주를 거부했으며 율곡사업 비리에 대한 감사로 전직 국방부장관 2명을 포함, 전직 해.공군참모총장, 전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6명을 수뢰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등 '성역'을 허물어 나갔다.
93년 말 총리에 임명됐지만 '헌법상 보장된 총리권한을 지키겠다'며 김영삼 대통령과 충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 정치역정 =선관위원장과 감사원장, 1백27일간의 짧은 국무총리 시절은 그에게 '대쪽'이라는 별명을 안겨줬다.
그는 이같은 강직함을 무기로 정계입문 1년 반만에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나 이후 터진 두아들의 '병역기피 의혹'과 이인제 의원의 신한국당 탈당으로 97년 대선에서 40만표차로 패배했다.
그렇지만 정치인 이회창은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을 이끌면서 그 '진가'를 드러냈다.
2000년 4.13 총선에서 김윤환 민국당대표를 비롯한 간판급 정치인들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모험을 강행하면서도 한나라당이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후 '제왕적 총재'란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 '이회창 대세론'을 형성하며 거대야당을 대과없이 이끌어 왔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