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4) '청마 유치환' <下>

문학청년이었던 김춘수는 친구와 함께 고향의 대시인을 방문했다. 점심 무렵이었는데,청마는 유약국집 마루에 혼자 앉아 파쌈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는 파쌈을 고추장에 찍어 입에 연신 집어넣고 있었다. 결벽증이 있던 문학청년의 눈에 청마의 모습은 너무나 세속적으로 비쳐 실망감이 컸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김춘수가 청마를 방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15일 통영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청마가 대표가 되고 윤이상,전혁림,김춘수 등이 간사를 맡았다. 문맹자를 위한 한글 강습,시민상식 강좌,농촌 계몽연극 공연 등을 하는 계몽적인 예술운동단체였다. 청마는 교육계에 오래 몸담고 있었다. 1954년에 안의중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그 뒤로 경주중·고등학교,경주여중·고,대구여고,경남여고 등의 교장을 지냈다.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에 자유당의 정책에 잘 따르지 않던 청마는 한때 미움을 사서 교장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청마는 학생들로부터 단단한 신임과 함께 인기가 높았던 교장이었다. 전근 발령이 날 때마다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학생들이 유임 데모를 벌이곤 했다. 그 뒤 청마는 경북대학교 문리대에 자리를 얻어 시론을 강의했다. 청마는 향촌동에 있던 백구세탁소 2층에 세들어 살았다. 추운 겨울이면 방안에 있던 잉크병이 얼기도 했다. 이때 경북대 의대를 나온 문학청년 허만하는 혼자 청마를 흠모하며 시를 쓰고 있었다. 1960년 이른 봄 허만하는 대구 경북여고 부근 육군 관사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청마의 집을 방문했다. 청마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실직 상태였고,한쪽 다리는 신경통으로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이다. 햇빛이 따뜻했던 그날 마루 끝에 걸터 앉은 허만하가 얘기 끝에 청마에게 "선생님,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라고 묻자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라고 청마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러면은 너는 오늘 이 시간까지를 진실로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왔으며 또한 살아 있는지,천길 벼랑 끝에 딛고 선 절망의 공허감에 시방 잇빨을 갈고 내닫는 차 쇠바퀴에 반드시 두개골을 부딛고 말리라.' 청마는 죽기 십여년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마치 시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과 같은 글이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 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 문인을 만났다.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렀다. 청마는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에 사이다를 마셨다. 술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부산의 좌천동 앞길에서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다가 한 시내버스에 치였다. 밤 9시 30분경이었다. 청마는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유독 천년고도 경주를 사랑해서 주말이면 술집들이 늘어서 있던 '쪽샘'을 거쳐 반월성이나 남산 기슭을 자주 거닐다가 돌아가던 청마는 그렇게 떠나갔다. '경주 남산 기슭에 초가 삼간 짓고 할망구와 단둘이 살다가 뼈를 묻겠다'던 시인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청마는 부산시 서구 하단동의 산록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