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 휘둘리는 한국증시] (4) '애널리스트의 항변'

"특정 고객에게 리포트를 먼저 주거나 전화로 핵심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고객에 따라 전달되는 시차가 하루이상 차이나면 곤란하죠." 외국계 증권사 한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말문을 열면서 "최근 워버그의 삼성전자 보고서가 파문을 일으키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명의 애널리스트 보고서가 전체 해외 투자자의 시각을 바꿔놓을수는 없다"며 "국내 기관투자자나 일반 투자자들을 분노하게 만든 핵심은 투자의견을 불과 사흘만에 바꾼 경우가 드문데다가 사전유출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워버그의 조너선 더튼 애널리스트가 특정고객에게 먼저 정보를 흘렸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해외 투자자들의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서둘러 투자의견을 하향 조정한 것이 문제의 발단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외국계 증권사 리서치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고쳐야 할 관행은 외국계 증권사의 영업담당자와 국내 기관간의 결탁"이라고 꼬집었다. 이른바 '프런트 러닝'(front running:특정고객에게서 들어온 매매주문 정보를 가지고 다른 고객 또는 자사 계좌를 통해 미리 매매하는 행위)은 그동안에도 자주 발생했다는 것.예를들어 외국계 증권사 영업맨이 전날 저녁에 들어온 해외투자자 주문을 받았다고 치자.이 담당자는 아침에 이를 확인하고는 큰 고객인 국내 기관에 이를 미리 흘려준다는 것이다. 일부 '발빠른' 애널리스트들도 이같은 일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금융 쪽에서도 '모럴 해저드'는 존재한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증권사가 국내 기업의 재정주간사를 맡으면서 내부거래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게 증권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실제로 살로먼스미스바니(SSB)는 지난해 5월 하이닉스반도체의 주식예탁증서(DR)를 발행하면서 하이닉스의 수익 전망을 부풀렸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지난 2000년 LG화학이 지주회사와 자회사로의 분리를 검토할 당시 초안이 지주회사에 유리하게 자산 분배가 이뤄지도록 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 당시 주간사를 맡은 외국계 증권사 창구를 통해 매도물량이 쏟아져 나와 주가가 30% 이상 하락했었다. 따라서 물증은 없지만 당시 컨설팅부문과 증권부문의 방화벽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시장에 공공연히 나돌았었다. 한 외국계 증권사 기업금융팀 담당자는 "솔직히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기업금융팀이나 상품운용부서 리서치부서 사이에 방화벽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떤 거래가 오가고 있는지 알 때도 적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국내 증시에 대한 외국계 증권사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개인 대상의 소매영업은 하지 않지만 굵직한 기업들을 상대로 M&A(인수합병)건이나 주식·채권 발행업무를 도맡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국내 상장·등록기업들의 지분을 듬뿍 갖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의 주된 거래창구다. 모 국내 증권사 펀드매니저는 "삼성전자 등 소위 시가총액 '빅5'에 대한 외국인 지분보유 비중이 절반이 넘는 상황에서 외국계 증권사들의 입김은 강할 수밖에 없다"며 "이렇다보니 국내 기업들도 외국계 증권사에만 '알짜 정보'를 주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고성연 기자 amaz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