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주인 '롯데' 맞는 '미도파'] 영욕 뒤로하고 간판 바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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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백화점이 미도파 매각 입찰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써냄에 따라 미도파의 새 주인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대농그룹의 마지막 주자이자 한때 백화점의 대명사였던 미도파는 대농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미도파는 1922년 정자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해 1969년에 미도파로 이름을 바꾼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이었다.
또 1979년 서울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서기까지 국내 1위의 백화점으로 군림했다.
연말이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는 젊은이들로 붐볐고 시골사람들의 서울구경 1호로 꼽히기도 했다.
미도파의 모기업인 대농은 1955년 4월 대한농산이라는 농산물 무역업체로 출범했다.
섬유 수출이 활발하던 70년대에는 재계 랭킹 10위권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임금의 급격한 상승과 면방경기 악화가 겹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됐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견딜만 했다.
결정적인 몰락의 계기는 지난 97년 초 신동방과 홍콩 칭콩그룹(페레그린증권의 모회사)의 적대적 M&A(인수합병) 공격으로 촉발됐다.
이는 당시 한국 기업 사상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적대적 M&A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지분 쟁탈전은 우여곡절 끝에 미도파의 경영권 방어로 결론이 났지만 미도파는 이 과정에서 1천3백억원에 달하는 현금을 동원하느라 자금이 고갈돼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주저앉고 말았다.
당시 그룹 내 뜻있는 사람들은 '대농을 팔아서라도 미도파를 건지자'고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죽어도 모기업은 안돼'라는 오너의 한마디에 맥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당시 오너가 결단을 내렸더라면 유통업 위주의 그룹으로 좋은 날을 기대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경제논리보다 감정을 앞세운 기업가의 전근대적인 고집이 명예도 돈도 모두 잃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무리한 사업 확장도 큰 패착으로 지적된다.
박용학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1989년 취임한 박영일 회장은 주력인 면방과 유통 외에 금융 정보통신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자금이 없어 무리하게 은행 돈을 끌어다 쓴 것이 그룹 전체가 부실화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결국 2세 경영인 박영일 전 회장은 회장에 취임한 지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맨손으로 회사를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미도파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농 미도파의 퇴장과 함께 지나간 세기 우리 기업들의 잘못된 경영 관행도 함께 퇴장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