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 '박성희의 괜찮은 수다'] 옥탑방과 블랙&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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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은 환경과 선험을 벗어나기 어렵다.
"밥이 없어? 그럼 빵 먹지" 혹은 "우리집은 정말 가난해.정원사도 가난하고 운전기사도 가난하고..."라는 우스갯소리가 있거니와 겪지 못한 걸 알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관심사 역시 마찬가지다.
"인식해야 존재한다"는 말처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지 못한 일에 관심을 두기란 힘들다.
최근 "블랙앤드화이트"와 "옥탑방"을 둘러싼 정치권의 귀족 서민 논쟁은 이런 점에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알려진 사실은 대강 이렇다.
한나라당에서 노무현 후보가 40만원짜리 블랙앤드화이트 티셔츠를 입었다며 "가짜 서민"이라고 공격하자 민주당에서 "누가 선물해서 입었지,비싼 것인 줄도 몰랐다"고 맞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이회창 후보가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옥탑방을 설명하지 못하자 민주당에서 "귀족은 다르다.옥탑방도 모르고"라고 역공했는데 곧 이어 노무현 후보 역시 다른 자리에서 옥탑방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는 얘기다.
"블랙앤드화이트"(Black&White)는 강아지 로고로 알려진 일제 골프웨어다.
원래는 까만병에 하얀 라벨을 붙인 스코틀랜드산 스카치위스키 상표인데 80년대초 일본의 스포츠웨어(주)가 위스키=영국=골프=고급스러운 이미지라는 데 착안,골프웨어 브랜드로 만들었다고 한다.
심볼마크인 두 마리 강아지는 스코틀랜드산 테리어종으로 귀여운 외모와 달리 사나운 사냥개다.
국내에선 마스터즈통상 이 88년 수입한 뒤 매년 판매량이 50%씩 늘어날 만큼 인기있다는 소식이다.
두 후보 모두 문제의 티셔츠가 뭐고 얼마짜리인지 몰랐을 수 있다.
한국 남편들이 아는 옷값은 진짜에서 0을 하나 뗀 수치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남자들이 옷에 대해 아는 경우가 드문 게 현실이니까.
어쨌거나 마크도 선명한 유명 골프티셔츠를 입고 농사일을 하는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의 출연진과 비슷한 경우가 된 셈이다.
옥탑방은 주택이나 빌딩 옥상에 물탱크용으로 만든 걸 은근슬쩍 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처음부터 주거용으로 만든 게 아니니 당연히 여름엔 찜통이고 겨울엔 냉장고지만 TV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 "지금은 연애중",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보듯 가난한 이들에겐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 위에 멋진 추리문학관을 지은 소설가 김성종씨도 한때는 천승세씨와 서울 무교동 허름한 건물 옥탑방에서 원고지와 씨름했거니와 옥탑방은 여전히 서민들에겐 익숙하면서도 서럽고 안타까운,그런 곳이다.
서울에만 2만5천가구나 되고 그 때문에 양당이 지난해말까지 완공된 전용면적 85평방㎡ 이하 단독 다가구 다세대 주택에 한해 "한시적 옥탑방 양성화법안"(특정건축물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을 마련중이다.
옥탑방에 관한 질문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인데 두 후보 모두 이렇다할 대답을 못한 결과가 됐다.
비싼 골프티셔츠를 평상복으로 입으면서 옥탑방에까진 관심이 미치지 못한 대통령후보들.
공인의 경우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이 보통사람들에겐 심한 좌절감과 박탈감, 심지어 이유없는 배신감까지도 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일반 국민들이 원하는 건 억지로 서민인 척하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형편과 처지를 제대로 알고 정책과 비전을 제시했으면 하는 것일 터이다.
멀쩡히 있는 옷 놔두고 시장옷을 사입거나 자꾸 핑계를 대기보다는 그간 무심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제부터라도 이땅 서민들의 애환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천번만번 중요하지 않을까.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