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행복 안겨준 월드컵 .. 박라연 <시인>

지역도 당도 성(性)도 노소도 빈부도 아픈이도 죄인도 없는 순간을 맞아 본 적이 우리 역사에서 몇번이나 있었을까. 이번 월드컵을 통해 '축구는 인생을 가장 짧게 그려내는 시(詩)'라는 생각을 해 본다. 열한명이 공 하나를 몰고 다니면서 시를 쓴다. 그 시가 쓰여지는 지면은 물론 각국의 국민이다. 시는 전세계의 화면에서, 전세계의 지면에서 읽혀진다. 한편 한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각자의 전율은 다르기도 하고 한몸이기도 하리라. 특별한 구절의 시구 앞에서 머리 두쪽이 쫘악 갈라지는 전율을 체험했다. 황선홍이 이을용의 어시스트를 받아 왼발로 센터링한 것이 그대로 골문을 흔들 때였다. 그 순간 그물이 유난히 오랫동안 흔들렸던 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한 몸이 된 4천7백만 우리 국민의 전율 때문이었으리라. 아일랜드가 강호 독일을 맞아 종료 1분 전에 동점 골을 터뜨릴 때,42위였던 세네갈이 개막전에서 프랑스를 격침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듯 덴마크를 맞아 동점으로 경기를 마쳤을 때 쓰여진 시는 또 얼마나 깊고 넓은 성찰의 구슬들이었을까. 그러한 감격의 순간마다 쓰여졌을 생에 대한 경구들을 상상하다가 무릎을 친다. 좋은 선수 감독 스태프 경기장 등은 국력이 좌우하리라. 또 심판의 판정을 힘이나 물질로 혹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운만은 살 수 없을 것이다. 행운은 오직 그 행운을 떳떳하게 소리내어 기도할 수 있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선수와 스태프들이 남몰래 바친 정당한 땀만이 행운도 끌어올 수 있다는 듯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짜디짠 땀이 맑은 이슬이 돼 며칠째 그 이슬을 마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들의 목마른 가슴에 스며들고 있지 않은가. 전세계가 함께 울고 웃는 축제의 날들을 연일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에 영원히 새겨졌으면 좋을 소망 하나, 월드컵 베이비 시 한편을 쓰고 싶다. 우리는 때때로 '그릇'이다. 아니다 매일매일 그릇일 수밖에 없다. 무엇을 담기도 하고, 무엇을 쏟아버리도 하고, 담겨진 것들을 마시기도 한다. 그런데 서울의 많은 그릇, 즉 공터들은 지금 가득 찼으나 텅 비었다고 한다. 돈 받고 지지자의 띠를 두른 아르바이트 아줌마들만 공터를 채우고 있을 뿐 아무도 없다고 한다. 월드컵의 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유권자들의 속마음이다. 6.13 지방선거의 승자가 되려고 그릇 속에 서서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듣는 이가 없다. 모두 축구공이 써줄 시를 받아먹으려고 다른 공터에 있기 때문이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기기 위해 쏟아내는 후보들의 근거 없는 비방 욕설들을 받아 안아야 하는 불쌍한 그릇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귀한 시간을 할애한, 귀한 그릇을 들고 서 있는 많은 유권자에게 이 무슨 행패인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햇덩이만큼 이글거리는 붉고 달콤한 행복을 체험했으리라. 황선홍 유상철 홍명보 안정환 등 히딩크가 이끄는 독특하면서도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거함이 우리 그릇 깊숙이 넣어준 햇덩이가 지금껏 살아서 우리들 가슴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그 행복한 순간들을 오래 간직하려고 또 한번의 햇덩이를 받아 안으려고 저마다의 장소에서 떨며 대 미국전을 기다리고 있다. 후보들이 애써 준비한 비방과 욕설들을 쏟아낼 그릇이 없어져버린 셈이다. 욕할 장소를 잃어버리게 한 것처럼 통쾌한 시가 또 있을까.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얻은 과즙을 후보들도 얻었을 것이다. 부디 월드컵 덕분에 물컹물컹 만져지는 싱싱한 즙들을 혼자서 다 마셔버리지 말고 한 편의 정치 시를 쓰기 위해 아껴둔다면 좋겠다. 그리하여 후보들이 몸 구석구석에 주렁주렁 열리게 될 사과 배 등을 달고 우리 유권자들 앞에 서 준다면 좋겠다. 아직 수확할 처지가 못되더라도 그 달고 새콤한 과즙들을 당장 유권자들에게 나눠줄 수 없더라도 '아! 저런 분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겠구나!' 라고 침을 삼킬 수만 있어도 행복하리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지옥 훈련을 거친 자만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줄 수 있는 수비 및 공격, 뛰어난 용병술을 갖춘 후보자를 만날 수 있다면 또 다른 월드컵의 쾌재가 되리라, 월드컵의 존재이유가 되리라. 지역도 당도 성도 빈부도 아픈이도 죄인도 군인도 없는 순간이 자주 우리의 것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