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6) '시인 천상병' <中>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6·25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 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 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시인 민영 등이 '요절 시인' 천상병의 유고 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 장정의 천상병 시집 '새'가 나오는데,시집 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 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