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표정] 열광...환호...감동 .. 日 열도 '짜릿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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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러시아를 1-0으로 꺾은 9일 밤 일본과 러시아 모두 광란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일본 열도는 열광하는 팬들이 거리를 가득메우며 내지른 환호성이 밤 하늘을 찔렀지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석패에 분노한 축구팬들이 난동을 일으켜 1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후지텔레비전은 "16강 진출이 성큼 다가왔다"며 "일본의 축구 역사가 새로 씌여지기 시작했다"고 환호했다.
주심이 경기 종료 휘슬을 분 뒤에도 텔레비전은 모두 밤늦도록 경기 장면을 되풀이해 내보며 열광했고 신문들은 가두 전광판과 인터넷 신문을 통해 승전보를 열도 전역에 급히 타전했다.
후반 6분께 이나모토 준이치의 골이 러시아의 그물을 가르자 일본 열도 주택가 곳곳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경기가 치러진 요코하마 경기장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관중석이 불꽃 놀이를 하는 듯 번쩍 거렸다.
본부석 왼쪽에 자리잡은 일본 응원단 일부는 관중들이 빠져나간 뒤에도 초대형 일장기와 일본 축구팀 깃발을 흔들어 대면서 밤새는 줄 모르고 수십명씩 몰려 뛰어다녔다.
○…이날 러시아의 모스크바 크렘린궁 인근 마네즈흐 광장에 설치된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일본전을 시청하고 있던 수천명의 러시아 축구팬들은 일본의 첫 골이 터진 직후 국영 TV방송의 차량을 뒤집어엎고 주변에 주차된 차량 20여대의 창문을 깨뜨리는 등 난동을 일으켰다고 인테르팍스통신이 전했다.
이들은 또 광장 인근에 주차돼 있었던 4대의 차량에 불을 질렀으며 인근 상가와 식당의 창문을 파괴했다고 전했다.
일본전 패배에 격분한 일부 축구팬들은 국가 두마(하원) 건물을 공격,경찰관 수명이 부상을 당했다.
주러시아 일본 대사관은 경기직전 거주 일본인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집안에 머물 것을 당부했다.
○…예선리그 통과의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생각한 때문인지 이날 경기에서는 양국 고위 정치인들의 응원전도 뜨겁게 펼쳐졌다.
4일 벨기에와의 시합에는 전반전이 끝날 무렵 경기장에 도착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이날은 시합 전 일찌감치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벨기에와의 시합에서 2-1로 잠시 앞섰던 일본이 동점골을 허용하자 책상을 두드리며 안타까워하는 등 열렬한 응원을 보냈는데 대 러시아전에서도 선수들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뜨거운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후반 6분 이나모토 선수의 슛이 골 네트를 흔들자 벌떡 일어서서 플라스틱 응원나팔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열광하기도 했다.
일본측 로얄 박스에는 럭비선수 출신이자 스포츠팬으로 소문난 모리 전 총리도 모습을 보였다.
일본을 방문중인 러시아의 의원단도 자국 선수들에게 경기장에서 열띤 응원을 펼쳤다.
일행중 자도르노프 전 재무상은 경기에 앞서 타스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전력이 뛰어난 러시아 대표팀이 일본팀에 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으로 말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러시아 우주 비행사들도 응원에 한 몫을 거들었다.
국제우주정거장에 파견근무중인 러시아의 트렌체프 비행사는 지상과의 교신에서 대표팀의 선전과 승리를 기원했다고 타스통신이 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그러나 요코하마 경기장에 자리한 2천여명의 러시아 응원단은 일본 응원단 인파와 함성에 파묻힌데다 러시아팀이 화끈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한 채 갈수록 패색이 짙어지자 입술을 굳게 다물거나 고개를 떨구면서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합 전 트루시에 일본대표팀 감독이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러.일전쟁등 일본과 러시아간의 껄끄러운 과거사를 의식한 때문인지 민감한 질문이 나오기도 했으나 트루시에 감독이 스포츠에 정치를 연결시키지 말라는 답변으로 피해갔다.
일부 일본 보도진은 8일 기자회견에서 9일 시합을 20세기초의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후의 북방영토 분쟁에 연결지어 질문을 던지며 트루시에 감독의 견해를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트루시에 감독은 이에 대해 "젊은 선수들이 얼마나 정치적 의식을 갖고 있겠느냐"며 "지금은 스포츠(축구)만 생각할 뿐"이라고 받아 넘겼다.
도쿄=양승득 특파원,베이징=한우덕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