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내가 행사하는 한票의 의미..朴孝鍾 <서울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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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방선거일이다.
그 동안 월드컵에 묻혀 그 열기를 감지하기 어려웠으나,분명 투표는 중차대한 행위다.
문제는 이 당연한 사실을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 정치는 축구의 선전과 비교돼 찬밥신세로 전락한 느낌이다.
정치를 통해 분열을 절감하고 있는데 비해 축구를 통해 우리가 하나 되는 짜릿한 경험을 하고 있으니,선거참여보다 축구응원을 더 가치있는 행위로 치부하려는 태도를 어떻게 잘못됐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투표행위는 소중하다.
우리가 뽑은 정치인들의 부도덕과 부정부패에 대해서 실망을 금할 수 없고,또 정치가 축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불신을 받고 있다고 해도 투표행위가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엊그제 우리는 미국과의 일전을 응원하기 위해 시청앞 광장에서 비를 무릅쓰고 있었다.
그 시청앞 광장이 유달리 감명깊게 느껴지는 것은 6·10민주항쟁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1987년 당시 왜 우리는 시청앞 광장에 모였던가.
대표자를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오늘의 지방선거도 대표자를 우리 손으로 뽑는 절차임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참여란 과연 중요한 일인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인간활동 가운데 가장 고귀한 활동으로 규정했고 또 아테네 사람들도 정치현안이 있을 때면,만사를 제쳐두고 광장에 모였다.
이른바 민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정치를 영어로 '폴리틱스'라고 하는 것도 '폴리스',즉 공동체에 관한 일이라는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인간활동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참여를 최우선적 가치를 가진 행위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아기자기한 연인과의 사랑,훈훈한 정이 넘쳐흐르는 가족생활,망중한을 즐기는 여가생활,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이는 직장생활,신앙에 정진하는 종교생활 등도 모두 나름대로 소중한 가치를 가진 활동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휴일날 가족간의 유대를 다지기 위한 가족 나들이는 정치참여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노약자가 병든 몸을 이끌고 투표에 참여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또 정치적 선택은 경제적 선택과 비교해보면 부실한 선택이 되기 십상이다.
시장에 물건을 사러갈 때 여러 상품을 꼼꼼히 비교하고 값을 따지면서 양질의 상품을 고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투표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투표장에 가기로 마음먹기도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설사 투표장에 간다고 해도 후보자가 누군지,어떤 정책을 공약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눈뜬 장님'처럼 투표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시장의 불량상품에 비유되는 불량대표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투표하는 행위는 나에게 있어 손실이 이득을 압도하는 행위다.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의 정보를 취득하는 데는 노력과 시간이 든다.
또 내가 어느 후보자에게 투표한다고 해서 그 후보자가 반드시 당선되는 것도 아니며,설사 당선됐다고 해도 내가 바라는 정책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결국 투표행위란 이득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비합리적' 행위가 된다.
또 투표행위는 법적 의무도 아니다.
투표하지 않았다고 해서 벌금이나 과태료를 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투표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투표는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행위는 아니지만 공동체에는 필요하고 소중한 행위다.
즉 공공재적인 성격을 가진 행위가 투표행위인 셈이다.
공공재를 위해 기여한다는 것은 나에게 적어도 작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공동체를 위해 부담과 비용이 소요되는 투표라는 공공재에 참여한다면 나는 시민으로서 의무라기보다는 덕목을 실천한 셈이다.
내가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치울 의무는 없지만,거리의 청결을 위해 쓰레기를 치운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행위고 덕스러운 행위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오늘 반드시 투표해야할 의무는 없다.
투표보다 더 절박한 일,더 중요한 일,더 의미있는 사적인 일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작은 불편과 희생을 무릅쓰고 투표에 참여한다면 시민적 덕목을 실천하는 셈이 될 것이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