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월드컵과 방송..金榮奉 <중앙대 경제학 교수>

월드컵 잔치가 끝났다. 만사를 접고 온 국가가 '16강' '4강'만 외치던 한달이 이제 다리 밑의 냇물처럼 과거가 돼 모두 흘러가 버리고 있다. 일월성신이 기적의 배열을 이루고 대지의 기(氣)가 합쳐질 때, 세상에 정말 불가해(不可解)한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월드컵은 4년에 한번 세계 최강을 가리는 축구전쟁이다. 달랑 수백명 관중을 달고 열리던 한국축구가 세계랭킹 5위 6위 8위라는 슈퍼파워를 차례로 무릎꿇렸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판정 시비를 걸 것이 아니라, 한국에 돌아온 시운(時運)을 축하했어야 했다. 편파적 환경이나 불운에 실패를 돌리는 자는 어느 세계에서나 구제할 길이 없다. 한국은 그 동안 바르지 못한 세계환경 탓으로 자신의 몫 이상의 고통을 받아 왔다. 식민지로 지배받고 국토가 분단되고 국민성은 오해받았다. 한국이 오늘날 건강한 경제와 민주화를 이루어 세계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주변을 탓하는 '울보(crybaby)'가 되기보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수십년 질곡(桎梏)의 시간을 극복한 때문이다. 이번 월드컵의 승리는 과거에 부당하게 당한 '대한민국'이 스포츠에서 얻은 하나의 배상(redemption)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의 언론매체들은 월드컵에서 얻은 국가적 수확과 교훈을 해부하고 보도하는데 바쁘다. 그러나 후유증과 반성이 없는 축제란 있을 수 없다. 들뜬 파티가 끝나고 냉정한 일상(日常)으로 복귀하는 날, 한국의 언론사들은 누구보다 먼저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번 월드컵의 압권은 무엇보다도 거리의 수백만 응원인파이다. 이것은 우리가 몰랐던 한국인의 응집력과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삽시간에 열화처럼 달아올라 집단 히스테리에 몰입하기 쉬운 우리 국민성을 동시에 과시했다. 지난 한달 동안 이것은 반목과 갈등을 일삼던 동과 서,신과 구,노와 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의 원천으로 승화됐다. 그러나 북한과 일부 과격한 종교집단에서 보듯이, 언제 불순한 의도에 이용되고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힘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방송매체들은 이런 국민성을 분별력있게 유도하기보다, 확대 도발시켜 상업적 기회로 활용하려는 자세를 노상 보여 왔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3대 공중파방송 모두가 월드컵을 동시 중계하고, 월드컵방송으로 전 시간을 메웠다. '월드컵에 합류하지 않는 자'는 할 것과 볼 것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전체주의의 위험과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세계적 웃음거리가 될 코미디도 출현했다. 세네갈 선수 하나가 대구시내 금은방에서 금목걸이를 훔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절도범을 검찰이 기소유예 처분한 것까지는 주최국의 손님접대로 봐줄 만하다. 그런데 바로 도둑질 당한 금은방 주인이 범인에게 휴대폰 금줄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정신나간 행동을 들은 적이 있는가. '오직 월드컵!'을 외치는 언론만 있다보니 생긴 백치적 행태이다. 18세기 네덜란드 출신 히스테리 치료사인 망드빌(Bernard Mandeville)은 '벌의 우화'(Fable of Bees 1714)라는 유명한 풍자시를 썼다. 사악한 인간들이 모여 소란을 떠는 사회(beehive)에서 도덕적 선(善)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잉태시키는 아첨'(flattery begot upon the pride)이라 한다. 아첨, 곧 칭찬은 이 악인들이 스스로를 선인으로 착각하게 하여 사회적 선을 생산하게 한다는 것이다. '질서 없고 배타적'이라고 평판받던 우리 국민들은 지난 한달 쇄신하여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내외 언론의 극찬에 보답해 빗속에서 쓰레기를 줍고, 외국인을 후대하고, 민족감정을 자제하는 국민으로 매일 바뀌었다. '선비는 사흘만 보지 않아도 괄목상대(刮目相對)한다'더니 월드컵 한달 동안 대한민국은, 축구경기에서도 매너에서도 선비어른으로 쑥 자란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국민을 바보로도 군자로도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성숙했으니 과잉반응을 자제하고, 냉정과 합리에 준해 행동하는 방송매체를 가질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