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를 '新문화로...'] (2) '우산을 접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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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0일 오후 2시30분 서울 시청앞.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의 분수령인 한-미전을 1시간 앞두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붉은악마'들은 우산을 펼쳤다가 이내 접고 비를 맞았다.
우산이 뒷사람의 시선을 가려 전광판 스크린을 보지 못할까봐서였다.
이웃을 배려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기성세대는 그렇지 못했다.
뒷사람이 눈치를 주어도 못본 체하고 우선을 받쳐 들었고 서로 잘 보이는 곳을 차지하려다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였다.
남을 배려하는 새 문화를 선뵌 월드컵 세대(W세대: 15-25세 붉은악마 주력)는 그동안 자신의 관심분야 외에는 대화조차 꺼리는 이기적인 세대로 폄하돼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남의 생각에 쉽게 동조하지도 않지만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등 '3 테너' 공연중에 비가 내렸지만 영국 왕실 가족을 비롯한 관람객들은 비를 맞은 채 공연을 봤다"며 "남을 배려하고 폐를 안끼치려고 노력하는게 성숙된 시민사회의 출발점인데 우리는 월드컵세대에서 그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겨온 '개발연대 세대'와는 다른 '과'다.
반독재투쟁과 이념을 위해 개인적인 고통과 이웃의 작은 불편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일부 '항쟁세대'와도 다른 '종'이다.
이들은 승패에 관계없이 월드컵 축제를 밤새 즐기면서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급한 사람을 위해 좌측에 통로를 내주는 '신인류'다.
월드컵세대가 보낸, 남을 배려하는 '신문화 신호'를 생활의 일상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아직 이 나라, 이 사회를 책임진 선배세대의 몫이다.
박태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대화에서 영국이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지도층이 아래로부터의 혁신요구를 즉시 알아채고 변혁을 제도화했기 때문"이라며 "'포스트 월드컵의 핵심과제'는 기성 지도계층의 자기 혁신"이라고 말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