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8) '소설가 이병주' <下>

1992년 4월 4일치 도하의 신문들은 일제히 한 작가의 타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마흔네 살의 늦깎이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래 한 달 평균 2백자 원고지 1천 장,총 10만여 장의 원고에 단행본 80여 권의 작품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떠난 작가 이병주의 죽음을 알린 것이다. 그는 "격동의 현대사에 대한 소설적 복원"에 주력한 대형 작가,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일관한,프로패셔널리즘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있던 작가다. 생전에 그는 "나는 프로 작가다. 따라서 작품을 많이 써야 하며 어떠한 것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냉정한 평가대로 혼돈과 미제의 시대를 살면서 '양지 쪽으로만 걷는 인간,위난(危難)이 저편에서 피해 가는 사람'이었지만,그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속에 끼어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부하를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고,그 삶의 안쪽에 고난과 비극의 무늬가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병주는 "한이 많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이 풀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러니까 계속 써야 한다"고 말했다. 타고난 체력과 열정,박람강기로 무장한 작가였던 그의 죽음은 한국 문학의 부피를 늘려온 보기 드문 대형 작가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남긴다. 이병주는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다. 그가 다닌 진주중학은 일제의 조선어 과목 폐지와 일본어 상용,신사 참배,창씨 개명 강요로 대표되는 식민지 교육 체제 속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을 만큼 민족주의 정신이 퍼렇게 살아 있던 학교다.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식민지 교육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학풍 속에서 정신을 키운 이병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 메이지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다니던 1944년 학병(學兵)으로 소집되어 중국 쑤저우의 일본군 수송대에 배치된다. 그는 일제 패망 뒤인 1946년 3월8일 중국 상하이에서 미군의 LST를 타고 한국으로 귀환한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생가로 돌아와 쉬고 있던 그는 진주농고의 요청으로 영어 교사가 된다. 해방 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주농고 학생들은 좌익인 '학동(學同·학생동맹)'과 우익인 '학련(學聯·학생연맹)'으로 갈려 싸우고 있었고,교사들도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병주는 좌우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일종의 회색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이로 말미암아 '학동'과 '학련' 양쪽에서 '반동 회색 분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병주가 미국 뉴욕으로 떠난 것은 1990년 10월8일의 일이다. 그는 복간되는 신경남일보의 명예 주필 겸 뉴욕지사장 직함을 받고 조용히 출국한다. 뉴욕의 한국 교포 밀집 지역인 플러싱에 거처를 정한 그는 낮에는 원고를 쓰고 저녁에는 시내 곳곳을 산책하며 소일한다. 그가 숨지기 전에 쓰고 있던 소설은 장편 '카리브해'와 야심을 갖고 시작한 역사 실명 소설 '제5공화국'이었다. 건강이 나빠져 1991년 3월 뉴욕에서 돌아와 곧장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하는데,그때 그는 폐암 선고를 받는다. 주변에 그 사실을 숨긴 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작가는 속기사를 소개받기로 한 날,1992년 4월3일,이국 땅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그는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그 순간까지 '써야 될 소설'을 준비한 진정한 프로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