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9) '소설가 이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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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어느날, '명동 백작'이라는 애칭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1916~1983)가 고혈압으로 쓰러진다.
서울 명동의 오래된 문화적 상징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증권 회사들이 들어서던 무렵이다.
갑자기 이봉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문화 예술인들의 명동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필하모니며,크로이체,티롤,전원 등의 음악감상실이 곳곳에 건재하고,예술극장,카페 떼아뜨르,창고극장 등에서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한두 해 전까지 티롤 등에는 아직 새파랗게 젊었던 황석영,송영,조해일 등이 진을 치고 있다가 빠져나가고,뒤를 이어 서울대학교의 불문과 학생이던 이인성 등 '언어탐구' 동인들이 가끔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명동은 이제 더 이상 문화예술인들의 것일 수 없었다.
문화예술인들의 메카이자 주요 활동 무대이던 명동은 신흥 개발도상국의 젊은 금융인들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아들일 채비를 서둘렀다.
정치라곤 이승만 대통령밖에 없고,유솜이 한국 경제를 대표하고,구호물자,양갈보,화랑훈장,검은 상처의 블루스,바라크,꿀꿀이 죽뿐이던 시대,1950년대의 명동은 폐허의 비극적 교회였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문인들은 구호물자 속에서 건진 트렌치 코트를 걸치고 초저녁부터 '술취한 실존주의로 절규하고 떠들고 왁자지껄해지는' 밤의 명동을 연출한다.
그들은 '명동의 무너진 건물 사이의 길을 끼고 노천 주점에서 무겁게 취해' 갔다고 고은의 '1950년대'는 증언한다.
이즈음 명동에서는 일본인 아내와 헤어진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화가 이중섭,불교에 귀의해 무소유의 사상을 실천하며 주로 다방을 무대로 문학활동을 펼치던 반속반승(半俗半僧) 시인 오상순,특유의 독설과 배짱으로 서울 문단을 진압해버린 동양 고전을 두루 꿰뚫은 괴물청년 김관식 등이 함께 어울린다.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중학을 중퇴하고 낙향해 농촌 계몽 운동을 벌이던 이봉구가 소설가로 이름을 내미는 것은 1934년 중앙일보에 단편 '출발'을 선보이면서부터다.
얼마 뒤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청강생이 되는데,그는 이 때 비로소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는다.
1938년 귀국한 뒤 김광균·오장환·서정주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 시를 쓰며 일제 말기를 묵묵히 견디던 이봉구는 이윽고 소설로 전향해 '광풍객''밤차' 같은 단편들을 발표한다.
해방 뒤 그는 주로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
이봉구는 전쟁 뒤 김수영·김광주·이진섭·김광균·박인환 등과 거의 날마다 명동에서 어울리는데,그토록 자주 술을 마셔도 취해 흐트러진 모양새는 보인 적이 없었다.
'명동 백작'이라는 애칭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깨끗하고 단아한 태도 때문에 붙게 된 것이다.
전후의 과장된 허무와 절망감에 젖은 문인들의 술자리는 광태나 추태로 얼룩지는 일이 흔했다.
다만 이봉구가 끼여 있는 술자리는 으레 깨끗하게 끝났다.
그는 술 마시는 동안 세 가지 철칙을 준수하도록 동료 문인들에게 요구했다.
첫째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 것,둘째 술자리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 것,셋째 술자리에서 돈 꿔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 등이다.
그는 술을 마시되 한자리에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이봉구는 생전에 다섯 권의 창작집을 내는데,'명동 20년''명동''명동 비 내리다'가 그 가운데 세 권의 제목이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명동이 빠르게 변모하는 동안 '명동 백작'은 수유리 집에서 조용히 투병 생활을 했다.
1983년 1월29일 이른 11시,이봉구는 예순 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친다.
그날 명동에는 그의 한 창작집 제목처럼 스산하게 겨울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