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농업경제'] (3) 'FTA' .. 농업이냐 제조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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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포도시장을 개방하라는 칠레의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농림부 무역담당 관계자)
"농업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의 최대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공산품을) 팔기만 하고 상대가 경쟁우위에 있다고 해서 국내 농산물시장을 열지 않으면 '통상'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산업자원부 관계자)
제5차 한.칠레 FTA협상이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왔는 데도 관련부처 담당자들은 1일 이처럼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현 정부는 출범 직후 '열린 통상국가' 기치아래 미국 일본과의 투자협정, 칠레와의 FTA 등을 추진해 왔지만 집권말기가 되도록 '공산품수출촉진과 농업시장보호의 상충'이라는 고전적인(?) 고민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박번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교역국경을 없애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면서 농업과 농민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칠레와의 경우 정부는 관련부처간 '컨센서스'도 다져 놓지 않고 서둘러 먼저 제안을 했지만 지금껏 국내 농업문제(과일시장 개방)에 발목이 잡혀 답보상태다.
이 사이 한국보다 6개월이나 늦게 칠레와 FTA협상을 시작한 EU(유럽연합)는 지난 4월 협정을 체결했다.
EU 제품들은 당장 내년부터 현재 6%인 공산품 관세율을 면제받게 돼 남미 시장경쟁에서 10% 정도 가격경쟁력이 높아질 전망이다.
게다가 수출경쟁국인 일본이 멕시코와의 FTA를 체결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어 국내 수출기업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임기말 대통령을 다급하게 만든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6월 초 당시 이기호 경제복지노동특보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칠레에 파견, 양국간 FTA체결을 재차 다짐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청와대의 이런 움직임으로 인해 알맹이 없는 껍데기 FTA를 맺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국내 농민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과 배 등 과일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대신 칠레도 냉장고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 5개를 자유무역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협정을 추진한다는 얘기다.
외교부 관계자도 "수백개 교역품목중 몇가지가 빠진다고 해서 효과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경우 한·칠레 협정은 "서로 경쟁력있는 상품 교역을 자유화함으로써 교역이득을 극대화한다"는 FTA의 기본은 무시되고 철저히 '국내 정치용 협정'으로 변질되는 셈이다.
아마 정부는 '농민의 반발을 피하면서도 통상정책에 큰 획을 그은 절묘한 협상'이라는 평가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로지 FTA를 한 건 성사시켰다는 명분에만 연연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만약 칠레산 포도 등의 국내시장 진입을 제한하는 대가로 냉장고 등 한국의 수출주력 5개 품목이 자유화 혜택을 받지 못할 경우 한.칠레 FTA는 실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밑지는 장사가 될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왕윤종 연구원은 "정부가 '농민표', 경제적 필요성과 개방정부의 명분 사이에서 정면돌파가 안된다고 판단하고 정치적인 절충안을 고려하는 것 같다"며 "이 경우 협상자체론 실패작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