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KOREA] 제1주제 : '과학기술인의 현주소'

미국의 대기업인 G사 연구소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는 K모씨(40). 그는 지금도 4년 전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당했던 구조조정을 떠올리면 울화통이 터진다. 그는 대덕단지 연구소의 평범한 연구원이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뒤 바로 연구소에 들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개발한 과제만도 10여건. 이 모두가 사업화돼 수백억원의 매출효과를 올렸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가 몰아닥쳤다. 구조조정 쿼터에 맞춘 인원감축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실적에 관계 없이 단지 연구경력이 일천하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난 것이다. 그는 1년여간 실직자 생활을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포항공대에 들어가 박사학위를 땄다. 해외저널에 논문이 실리기가 무섭게 미국에서 입사 제의가 날아왔다. 그는 미련 없이 가방을 쌌다. IMF 구조조정으로 연구소를 쫓겨난 사람이 K씨만은 아니다. 대덕 연구단지 내 20개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옷을 벗은 사람은 98년부터 99년까지 9백31명. 연구보조원을 포함할 경우 전체의 20% 이상이 정리됐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석.박사급만도 98년 한햇동안 전체의 15%인 3백48명이 떠났다. 민간 연구소에서도 찬바람이 몰아닥쳤다. 업체별로 10%에서 많게는 30%까지 연구원을 줄였다.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박사를 받고 S그룹에 스카우트됐던 석모씨도 좌절의 아픔을 겪었다. 근무처인 도쿄 현지법인에서 대덕연구단지로 전격 발령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연구소를 떠났다. 명목상 전출 이유는 신규 프로젝트 추진이었지만 실상은 정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가 연구원으로 복직했다. IMF 구조조정은 과학기술과 연구원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구조조정 0순위'. 연구원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과학기술 입국' '과학기술자가 우대받는 세상' '과학만이 살길'…. 연구원으로서 그동안 남다른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정부 개혁을 한답시고 가장 먼저 연구원들에게 칼을 들이댔다. 고급두뇌들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렸다. IMF 구조조정 충격은 연구원들이 설 땅이 없음을 잘 보여줬다. 그 원인은 바로 한국적 풍토에 있다. 대덕단지 연구원들은 아직도 J 전 장관이라면 치를 떤다. 그는 "연구소가 내놓은 결과가 무엇이냐? 도무지 나오는게 없다"고 자주 얘기하곤 했다. 과학기술개발을 위해선 오랜 시간과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한다. 그만큼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는 얘기도 된다. 진행되고 있는 과제가 돈으로 얼마 정도의 가치를 창출했는지를 계산해 내기는 정말로 어렵다. 그런데도 정부 정책의 최고 결정자가 이같은 기본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연구원들의 지적이다. 대덕단지는 아직까지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옛날과 같은 연구열정을 찾아볼 수 없다. 주어진 과제만 수행하고 남의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오후 6시만 되면 연구소엔 정적이 감돈다. 기회만 된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구조조정은 이공계 대학 진학 기피 현상에도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공계 대학에 진학하면 찬밥 신세가 된다는 풍조를 낳았다. 대덕 연구단지에 연고를 둔 학부모들은 그 정도가 더했다. 자식들에게 이공계대를 가지 말라고 성화를 부렸다. "자식들에게 연구원이 되라고 권유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들이 스스로 연구원 되겠다고 할 이유도 없지만…." 원자력 연구소의 K모 연구원은 "이공계를 살리려면 정부 지원 못지않게 사회 분위기도 확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