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KOREA] 제1주제 : '방황하는 공대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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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후 서울대 중앙도서관 6층 6열람실.
여름방학중인 데도 6백여 좌석을 가득 채운 고시생들의 열기로 뜨겁다.
에어컨을 틀었는지 안틀었는지 모를 정도다.
고시생을 배려해 특별히 만들어진 2단 독서대엔 두툼한 법률서적과 법전들로 빈틈이 없다.
구석에서 형법총론과 씨름하고 있는 수험생 김정훈씨(25).
고시책에 큼지막하게 쓰여진 '974xx-xxx'이라는 숫자가 1997년에 입학한 공대생임을 말해 준다.
97 다음의 '4'는 바로 공대 번호다.
"공대생인 것 같은데 왜 사법시험을 준비하느냐"는 질문에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인 김씨의 대답은 의외로 진지하다.
"주위 우려와는 달리 요즘 공대생들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합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 치르면 한 학기가 지나가는 것은 옛날 얘기가 됐죠. 한 과목당 4∼5번 시험은 기본이고 한 학기동안 40∼50번씩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열심히 학교생활에 매달려도 돌아오는 보상은 너무 보잘 것 없다고 털어 놓는다.
또 다른 고시 수험생 진용한씨(24)도 목소리를 높인다.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병역특례를 거쳐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이 지방 공장에 처박혀 박봉을 받아가며 고생하는 걸 보면 괜히 화가 납니다."
그는 "고생한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공대생들 사이에선 '의.치.한(醫.齒.韓)으로 돌아가기' 열풍이 불고 있다"며 "심지어 입학하자마자 의대 치대 한의대에 가기 위해 다시 재수를 시작하는 후배들까지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재수에 실패해서 다시 복학하는 친구도 있다고 덧붙였다.
진 씨는 "의.치.한에 들어가기 싫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고시공부에 뛰어들고 있다"며 "사법시험과 변리사시험을 합치면 공대생 5명중 1명은 고시생일 것"이라고 귀띔한다.
서울대는 지난 6월17일부터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시작했다.
최근들어 계절학기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서울대 캠퍼스는 방학중인 데도 강의실을 오가는 학생들의 발길로 분주하다.
특히 공대 고시생들에겐 계절학기 수업이 필수코스로 통한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오후 5시30분 신공학관 강의실 앞에서 만난 홍성환씨(24)는 "대부분의 공대 고시생들은 졸업장만 따면 된다는 생각으로 전공에는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며 "짧은 시간에 학점을 딸 수 있는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많이 이용한다"고 밝혔다.
그는 가방 가득 사법시험 준비서를 담고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학원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
홍씨는 고시의 메카로 통하는 신림9동 좁은 골목길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고시원과 독서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독서실 앞 계단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박준현씨(33).
그는 공대 졸업생으로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그만두고 뒤늦게 고시대열에 합류했다.
"어려서부터 엔지니어 꿈이 있었죠. 96년 졸업한 후 대기업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꿈을 이룬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평생 빠듯한 봉급생활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콱 막히더라고요. 법대에 들어가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로 활약하는 고등학교 동창녀석과 비교가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인생 진로를 수정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박씨는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두살배기 아들 녀석을 혼자 키우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왜 내가 공대를 선택했을까 하는 후회가 생긴다"며 독서실안으로 사라졌다.
서울공대에서 고시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이공계 위기가 사회 이슈가 된 90년대 중반들어서부터였다.
최근엔 대학원생들까지 고시대열에 합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민구 공대학장은 "공대의 고시열풍이 아직은 걱정스런 상황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확산될 경우 국가적인 인력낭비일 뿐 아니라 연구풍토 조성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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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위원실 =안현실 논설위원겸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