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코너] 기로에 선 그린스펀

미국은 지금 '영웅 몰락시대'다. 9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영웅으로 부상했던 거대기업 CEO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다. 케네스 레이(엔론),버나드 에버스(월드컴)로 시작되는 '몰락 영웅 리스트'는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월가의 요즘 화제중 하나는 이 '리스트'의 가장 앞자리에 앨런 그린스펀 연준리(FRB) 의장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실제 많은 공감도 사고 있다. 경제방송인 CNN머니의 인터넷 설문조사는 이런 분위기를 잘 전달해준다. '그린스펀이 의장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찬성은 51%. 하지만 '그렇지 않다(30%)'와 '잘해왔지만 이제는 바꿀때(19%)'라는 응답을 합하면 반대가 49%에 달한다. 조용한 목소리로 세계 금융시장과 경제를 통제하는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사결과다. 그린스펀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떨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회복이 예상외로 늦어지자 그 원인이 '그린스펀이 90년대 말 거품을 방조한데 있다'는 논리다. 강한 경기억제책이 필요한 때였지만 '비합리적 과열'이란 모호한 경고로 오히려 거품발생을 부채질했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그린스펀 비난의 선봉장격인 제임스 그랜트는 "그린스펀은 아주 능력없는 중앙은행장"이라며 "일본이 겪고 있는 장기간 경기후퇴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하루빨리 그를 바꿔야 한다"고 공격하고 있다. 물론 그린스펀 예찬론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월가 사람들은 87년 블랙먼데이 때나 98년 아시아와 러시아의 경제위기,지난해 9·11테러 직후 보여준 빠르고 정확한 처방을 예로 들며 그의 뛰어난 위기관리능력을 평가한다. 이제 그린스펀은 마지막 시험대에 올라 있다. 오는 13일 금리를 어떻게 조정할지가 첫번째 과제다. 현재로선 내리기도 안내리기도 어려운 상황. 이번 결정의 결과로 그가 영웅으로 남을지, 아니면 그의 이름앞에 '몰락한'이란 수식어가 붙을지 판가름나게 된다. 세계경제의 방향도 달라질 것임은 물론이다. 세계가 그의 입을 주시하는 이유이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