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24) '시인 김소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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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전반적 작품 경향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편들인 "정읍사" "가시리"와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님과의 사랑,이별,한 등을 향토적.민요적 언어와 율격에 담아 표현해 낸다.
때문에 수많은 주옥 같은 시편들에도 불구하고 유교류의 휴머니스트 라든가 과거지향적 수동주의 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유교적 과거지향은 도덕이나 규범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님이 원할 때면 언제라도 기꺼이 보내드릴 용의가 있는 융통성 있는,즉 현대적 자유가 부여된 복고주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1924년 이후에 발표한 '나무리벌노래' 외에 연대 미상의 작품 '봄''남의 나라 땅''전망''물마름''옷과 밥과 자유''가을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등의 시편과 유일한 소설 '함박눈' 등을 보면 민족적 저항의식이 은근히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 빼앗긴 땅에 대한 회복을 염원하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이 눈에 띈다.
'나는 꿈꾸었노라,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벌가의 하루일을 다 마치고/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즐거이 꿈 가운데.//그러나 집잃은 내 몸이여/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 물 손에/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중략)
소월의 한은 그의 성장기적 배경과 삶의 고단에서 오는 우울,그리고 시인이 말하듯 남의 나라 땅에서의 서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를 따라다니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허무의식과 슬픔에서 연유한 것에 더 직접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곧 그의 생애의 비극적 결말과도 연결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다만 그가 죽기 얼마 전 김억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보며 당시 그의 허무를 짐작할 따름이다.
'제가 구성(龜城)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 와서 10년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人事)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놓아 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좋겠느냐 하옵니다….'
소월이 자신에게 상속된 전답을 팔아 식솔을 끌고 처가인 구성군 평지동으로 이사한 것은 1924년이다.
그곳에서 동아일보 남시지국(南市支局)을 인계받아 혼자 신문 배포,수금을 모두 책임지고 경영한다.
그러나 사업 수완이 전무하고 세속적인 처세에 서툴렀던 그는 곧 파산해 버리고 생계를 위해 어울리지 않게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보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조선문단' 1927년 2월호 문단소식란에 의하면 그때까지 소월이 남시지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문학도,생활도,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도 놓아버린 소월은 술에 기대 세월을 보낸다.
소월이 술꾼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문중에서조차 그를 불량자로 낙인찍고 천시한다.
잦은 통음(痛飮)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진 소월은 1934년 12월 23일 아편을 먹고 서른세 해의 생을 마감한다.
'민족의 토속어·토착어를 가림새 있게 시적으로 승화하는 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송희복)한,지난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민족시인이었던 김소월은 식민지 변방의 소지식인으로 회의와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가 그렇게 덧없이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유장한 슬픔과 한의 시편들을 빚은 소월이 죽은 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그의 민요적 가락과 민족적 설화,정한을 담은 시편들은 오랫동안 시름 많고 흠집 많은 우리 겨레의 심사를 달래주며 널리 애송되고 있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