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갯벌의 생명을 위하여 .. 李柱香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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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왔다.
와서 노래를 불렀다.
끝을 알 수 없는 뻘밭에서 찬송가 가락처럼 따뜻하게, 염불처럼 엄숙하게, 아리랑가락처럼 애잔하게-.
노랫가락은 파장이 길었다.
게다가 바람이 쉬지 않는 바닷가였다.
바닷바람을 따라 그들의 가락은 멀리멀리 퍼져갔다.
시한을 정해 놓고 절멸로 향해 가는 무한한 생명들의 운명은 착잡하기만 한데, 착잡한 마음들에 녹아드는 노랫가락은 깊고 깊어 나는 망연해진다.
바람 때문이었을까, 바다 때문이었을까,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것 같은 가락 때문이었을까?
빈 북 같은 내 가슴 속에서도 쿵쿵 울림이 있었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나도 그들처럼 맨 발로 저 끝이 보이지 않는 뻘밭을 조심조심 걷고 싶었다.
그들이 왔다.
소문만으로 들은 멀고 먼 땅에서 그들이 왔다.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북미원주민이 이 곳, 새만금에 왔다.
여의도 면적의 1백40배,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세계적인 갯벌의 절망적인 운명이 안타까워서 그들이 왔다.
콧등이 시큰해지는 고혹적인 가락은 위로였을까, 한숨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상처였을까.
그들은 불안하기만 한 바닷가 이 넓은 뻘밭의 운명이 남의 일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소리는 더욱 깊었다.
저 깊고 깊은 가락은 어디서 왔을까?
아버지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물려준 저 가락들은 한 사람의 천재 작곡가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 가락은 1천5백년 넘게 살아왔다는 나무숲에서 왔고, 기원도 알 수 없이 아득하기만 한 큰 바위에서 왔고, 물살을 거슬러 힘차게 올라가는 연어떼가 살고 있는 강에서 왔다.
자연에서 삶을 받고 노래를 받은 그들은 그 노래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주었다.
자연 아닌 공연장에서 저 소리를 풀어놓을 때는 그들 스스로가 가혹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그럴 것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저 깊은 파장이 멀리 퍼져가지 못하고 공연장 벽이나 천장에 갇히면 듣는 이도 권태롭고 따분할 것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그 자체가 축제였고 제사여서 소문도 없이 모인 사람들을 모두 한마음으로 묶었다.
새만금 갯벌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그 마음으로.
그래, 보존하는게 아니라 살려주는 것이다.
새만금은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므로.
바다의 자궁이고 서해안의 어머니이므로.
우리가 식사를 하고, 뱀이 개구리를 먹고,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건 생명파괴라고 하지 않는다.
먹이사슬상 어쩔 수 없이 잡아먹는 건 생명의 질서이지 생명파괴가 아니다.
그러나 이 갯벌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 생을 영원히 포기하게 만드는 그 상황은 분명 생명파괴다.
생태계 교란이다.
그들이 어찌될지 모르는 이 뻘밭의 운명에 공명하는 것은 우울하고 아팠던 자신들의 운명 때문이었으리라.
캐나다 밴쿠버에서 1백여㎞ 떨어진 곳에 사는 치할레스 부족인 그들은 사방 70㎢, 울창한 숲과 기름진 강이 있는 그곳에서 연어를 잡아먹고 살았다.
조상 대대로 연어를 주식으로 살았지만, 강에는 연어가 마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강에 연어가 마르기 시작한단다.
천혜의 연어낚시터라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거기까지 간단다.
10마리를 잡아서 8∼9마리를 강으로 돌려주고 1∼2마리만 가져오면서 '생태낚시'라고 한단다.
그렇지만 한번 잡혔다 강으로 돌아간 연어는 모천에 이르지 못하고 죽어버린단다.
생을 반납할만한 공포스런 경험을 하고, 그 이후의 삶이 왜곡과 상처투성이일 수밖에 없었던 생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보통 1천3백년에서 1천5백년 된 나무들로 꽉찬 그 숲도 위기란다.
캐나다산 원목가구를 만들어 파는 기업들이 그들의 생명줄인 나무를 무참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베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실상사 천왕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토록 빠르고 은밀하게 산과 나무를 죽이다니, 도대체 산과 나무가 당신들의 적이란 말인가. 새들은 낯설게 변해버린 터전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이제 상처입은 영혼들은 어디가서 위로 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 산과 나무가 파헤쳐진 뒤에야,마지막 새가 사라진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인간이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