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터닝포인트] 이동훈 <성실엔지니어링 대표>

1972년 가을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이듬해엔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데다 간경화로 쓰러져 생계가 막막했다. 나는 13살되던 초등학교 6학년 때 경북 청송에서 작은 아버지의 권유로 병마와 싸움하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상경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동사무소의 지원을 받아 근근히 먹고 살았다. 2년뒤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졸지에 고아가 돼버렸다. 3남2녀중 둘째였던 나는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다. 작은 아버지한테 "바보짓 한다"며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움을 받아도 굶는 날이 많은데 학교라니.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철판에 구멍을 뚫는 동신타공에 들어갔다. 이 때가 15살. 집에서 나와 공장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새벽부터 청소하고,기계를 닦고,라면을 끓이고...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기술을 배우려고 악착같이 노력했다. 밤마다 몰래 금형을 만들어보고 기계를 만졌다. "초짜가 기계부터 만진다"며 선배 근로자들로부터 얻어 맞기도 했다. 2년쯤 지났을까. 이영주 사장이 나를 불렀다. "똑똑하고 성실하구나.열심히 해봐라"라며 기계를 만지게 했다. 그때 너무 기쁜 나머지 큰 절을 했다. 내 인생에 "희망"이 보였다. 밤낮을 안가리고 연구개발을 했다. 부러지지 않는 타공핀을 만들었고 열처리 방법을 개선하는 등 작업능률을 2배 이상 높였다. 회사는 매출이 쑥쑥 올라가며 잘 나갔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 여파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1979년말쯤 회사가 곤경에 빠지기 시작했다. 납품대금은 안들어오고 일감은 줄어들고 직원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월급도 6개월치나 밀렸다. 결국 회사는 부도났고 공장은 압류됐다. "자네는 한겨울 백두산에 올라가도 얼어죽지 않을 사람이네.힘을 내게" 이 사장은 부도전 "월급 대신"이라며 낡은 기계를 한대 줬다. 채권단의 압류품목에서도 빠진 고물이었다. 이 사장은 "성실함에 감명받았다"며 "성실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명까지 지어주고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나에겐 고민이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낡은 기계 한대로 사업을 하란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1981년 말 예기치 않은 기회가 왔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타공기계를 만들어달라는 사람이 있으니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원부자재를 모두 제공할테니 기계만 만들어 달라는 것. 나는 기계를 만들어 주었고 6백만원을 받았다. 이 돈으로 낡은 기계부터 수리했다. 직원도 몇명 뽑았다. 이듬해 3월 정식으로 "성실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연구개발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분쇄기계용 망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주류회사에 공급했다. 주문물량이 넘치면서 회사규모가 커졌다. 지금은 흡음판용 클린룸용 자동차휠터용 등 품목도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 사업초기 6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이 올해 1백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1996년에는 "숨쉬는 장독뚜껑"을 개발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 상품은 주문물량 감소로 어려움을 겪었던 외환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는 효자가 돼주기도 했다. 지난 1998년부터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이영주 사장을 영업소장으로 모시고 동고동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