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경제' 현장을 가다] (1) 대전 <上> : (향토산업) 한미타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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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 '타올산업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첨단 과학도시라는 이미지에 가려 대부분의 대전 시민들도 망각했다.
그러나 대전 경제를 이야기할 때 타월은 빠뜨릴 수 없는 품목이다.
대전의 타월역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에서 월남한 직물업자들이 타월 만들 때 좋은 경수(硬水)가 많은 대전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현재 대화동 낭월동 등에 50여개 업체가 가동중이고 공주 금산 연기 청원 등 대전 근교까지 합치면 80여개 업체가 들어서 있다.
대전시 대덕구 읍내동 대전산업1단지에 자리한 한미타올(대표 백광전).
한미타올은 대전권 타월 업계의 선두주자이다.
전국 시장점유율 10%로 부산 송월타월에 이어 2위인 이 회사는 대전에선 드물게 브랜드 이미지를 탄탄하게 구축했다.
변변한 회사를 찾아보기 힘든 대전 제조업의 현주소에 비춰 그나마 체면을 세워주고 있는 셈이다.
지난 71년 이북출신 타월업자 7명이 각자 운영하던 소규모 공장을 합병하면서 탄생시켰다.
현승종 전 총리의 친형인 현규종씨가 초대사장을 맡아 출범시킨 이후 연구.개발과 시설투자를 통해 성장을 거듭해 왔다.
심문길 부사장(70)은 "70년대 초만해도 엄청난 물량을 일본에 수출했고 내수도 절정에 달하는 등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며 이때를 한국 타월산업의 전성기로 회고했다.
한미타올은 일본을 거쳐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 자메이카 등으로 뻗어 나갔다.
80년대 들어선 여행 스포츠 등 여가문화가 발달한데다 선거까지 잇달아 재고 쌓일 틈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80년대말 이후 타월업계에도 시련이 닥쳤다.
값싼 중국산에 밀려 시장을 50%까지 내주면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위기를 맞은 한미타올은 자동화 설비로 발빠르게 맞섰다.
94년 이탈리아에서 전자컴퓨터 직기 등을 들여와 전공정을 자동화했다.
타월업계의 위기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97년엔 IMF(국제통화기금)의 직격탄을 맞았다.
각종 행사가 줄어 들고 여가생활도 축소되자 매출은 40%나 급감,고사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한미타올은 중국산과 더 이상 경쟁을 벌이지 않아도 됐다.
기능성 타월을 개발하는 등 품질을 고급화하고 공정 자동화에서 가격경쟁력까지 갖춰 중국산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한미타올은 최근 비상국면을 맞이했다.
기술력을 앞세운 일본 업체들이 중국에 진출, 여기서 생산한 고급타월로 국내 시장을 공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 부사장은 "노동의 질이 떨어지는 중국 대신 북한에 진출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표면적이 넓어 수분흡수력이 탁월한 신소재인 중공사(中空絲)타월 등 신제품을 선보이며 수요를 창출중이다.
한미타올은 업계 최초로 86년 KS 마크를 획득했다.
'품' 자나 'Q' 마크 등 인증마크를 가장 많이 보유한 업체로 떠올랐다.
대전=백창현 기자 chbai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