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낙 엽 別 曲 .. 金在爀 <고려대 교수.독어독문학과>

아침 저녁으로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기운이 뼈마디를 스친다. 하얀 모시에 살짝 풀을 먹여놓은 듯 상큼한 내음이 늦가을 공기 속속들이 배어 있는 듯하다. 릴케의 시 '가을날'중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는 첫 구절이 왠지 허망해 보이고, 오히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깨어서 책을 읽고,긴 편지를 쓸 것이며/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 시점이 됐다. 어떻게 보면 욕망의 물기가 싹 빠져 나간 가을은, 특히 늦가을은 여름 내내 우리 마음 속을 물들이던 검은 구름마저도 씻어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난 겨울의 얼어붙은 땅에서 기지개를 켜며 봄의 입김을 받아 활활 피어오르던 여름의 무성한 기억이 무심히 떨어지는 나뭇잎의 가냘픈 뒷모습에 서려 안쓰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거부하는 듯한 몸짓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모습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거기에 몰입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가 낙엽 지는 가로수들 사이를 거니는 나그네요,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주인공이 되는 이 계절에 내겐 나무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몇년 전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들렀을 때 본 웅장한 자태의 은행나무가 생각난다. 나이 약 1천1백여살, 키 60m가 넘는, 그야말로 나무 중의 나무라고 일컬어지는 명목(名木)이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대경대사를 찾아갔다가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경순왕의 세자인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가슴에 품고 금강산을 찾아가던 길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 고승(高僧)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자란 것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세종 때 나라의 온갖 재앙을 꿋꿋이 견뎌낸 공로로 정3품보다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의 벼슬까지 얻었다고 하니, 가히 세월의 풍상을 역사책처럼 가슴에 기록한 나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은행나무가 아직도 해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도록 열매를 매단다는 것이다. 당시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 나무의 끈질긴 생식력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좀 시기심 같은 것을 느끼면서. 나는 그 은행나무의 가슴 한복판과 아랫도리를 은근히 쳐다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 은행나무가 우리 인간들의 계통수가 아닐까. 그러자 문득, 달려 있는 수많은 나뭇잎중 하나가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나뭇잎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모두 달랐다. 우리 얼굴 모습이 다 다르듯이. 결국 우리 인간은 인류라는 커다란 나무의 한 잎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 개인이 한갓 나뭇잎 같은 존재임을 부정하고 수천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사는 은행나무가 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좀 지나친 비유가 될 지 모르지만, 인간들이 각자 자신만의 생을 연장시키기 위해 '병든 잎으로 사회라는 커다란 은행나무에 개인적 욕망의 이름으로 끝까지 매달려 있을 때' 과연 그 나무는 건강할 수 있을까.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아니 새순이 돋을 수 있는 자리를 내줄 줄 아는 나뭇잎이 되면 어떨까 되뇌어본다. 이 싸늘한 늦가을 새벽에, 정말로 배추속 같은 새벽의 정기(精氣)를 한 입 뭉텅 물어뜯은 입술로.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처럼 병든 여주인공을 위해 아직도 나무에 매달려 있는 양 나뭇잎을 억지로 벽에다 그려 놓아 생의 희망을 가식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형기 시인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라는 구절이 훨씬 더 많은 여운을 남기는 계절이다. 개개인 실존의 측면에 있어서나 한 나라의 정치 측면에 있어서나. 언제 떨어질까, 그 시점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실천하는 나뭇잎에서 결단의 미덕을 배울 일이다. 너와 나, 구별할 것 없이 나무의 한 잎새에 불과한, 우리는.늦가을의 향기가 화사한 장미향보다 짙게 느껴지는 이 계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