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풍랑 헤치며 '30여년 외길'] "한우물 팠더니 이젠 경영道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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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내로라 하는 대기업에 들어가 30년 이상을 근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거친 풍랑에 휩싸여 중도하차하거나 자의든 타의든 다른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기업에서 30년이 넘게 한 우물을 판 최고경영자(CEO)들은 그래서 남달라 보인다.
사원으로 입사해 국내 10대 그룹의 한 기업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들은 줄잡아 10여명.
이들은 해당 전문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데다 경영에도 늘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만능 플레이어들이다.
성재갑 LGCI 부회장(LG석유화학 회장)은 LG그룹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다.
그는 지난 63년 LG화학의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에 입사,40년동안 화학업계의 고속성장을 견인해왔다.
LG화학을 업계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앞장선 그는 현재 LG그룹의 화학 계열사를 총괄,"대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LG전자에서는 노용악 부회장과 김쌍수 디지털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 사장이 30여년간 한우물을 팠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69년 입사해 설계실에서부터 공장장,사업본부장등을 거쳤다.
지난 96년 경영혁신기법인 "6시그마"를 국내 최초로 도입해 생산성 혁신을 앞당기는등 "가전업계 신지식인 1호"로 통한다.
SK그룹에서는 황두열 SK(주) 부회장이 간판스타.
그는 68년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한뒤 줄곧 에너지 분야에만 종사했다.
황 부회장은 유공이 SK의 기업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는데 앞장서 기업인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이다.
그는 "사람관계에 충실했으며 업무를 준비할 때는 정확한 판단력,실행단계에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어부친게 오늘의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박병재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산 증인으로 불리운다.
68년 현대차에 입사해 캐나다 현지법인장 울산공장장 등을 두루 거쳤다.
박 부회장은 해외출장에서 귀국하고도 집에 들르지 않은채 다시 지방출장을 떠나는등 타고난 근면성으로 유명하다.
박 부회장의 취미는 "일"로 잠시도 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는게 현대차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업무처리 스타일은 "넘쳐서도 안되고 부족해서도 안된다"은 원리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김뇌명 기아자동차 사장의 이력은 매우 간단하다.
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한뒤 수출과 기획분야에서만 일했다.
입사시절에는 현대건설이 그룹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곳이었으나 그는 1,2,3지망을 몽땅 현대차로 적어내는등 자동차만 고집했다.
수출만 맡았으면서도 해외주재는 해본 적이 없는 그는 현대.기아차 최고의 영어실력자로도 정평이 나 있다.
심이택 대한항공 사장은 한진그룹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다.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그는 72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영업 정비 항공우주등을 두루 거쳤다.
포스코 이구택 사장은 69년 공채1기로 입사해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전형적인 "철강맨"이다.
수출부장 경영기획부장 제철소장 등 대부분 분야를 거쳐 포스코를 꿰뚫고 있다.
정치적인 외풍이 잦은 포스코에서 올해 대표이사 3연임에 성공할 정도로 회사 안팎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다.
김대중 (주)두산 테크팩BG 사장은 69년 동양맥주(현 OB맥주) 입사해 34년째 "술"에 심취해있다.
두산그룹내 영업통으로 통하는 그는 99년 선보인 뉴그린소주가 실패로 끝나자 1년간 사표를 들고 다니기도 했으나 그 뒤 "산"을 개발해 다시 대박을 터뜨렸다.
김 사장은 "항상 기본에 충실하고,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자세로 직장생활을 하는게 성공비결"이라고 후배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전경두 동국제강 사장은 64년에 입사해 올해 39년째 한 직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사 진급도 동기 가운데 가장 늦고 입사 38년만인 지난해에야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늦깍이"이지만 묵묵히 주어진 일에 충실해 최고경영자로 거듭 났다.
"새 직장에서 1백50% 능력을 보여 인정받을 바에는 지금 직장에서 1백% 노력을 기울이자"는 생각으로 타직장으로의 전직 유혹을 떨쳤다고 전 사장은 소개했다.
딜로이트컨설팅코리아의 박성일 회장은 컨설팅업계에서는 유일하게 3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인물.
그는 67년 미국 딜로이트투시토머츠 본사에 입사한 최초의 동양인이었으며 세계 5대 IT관련 컨설팅업체의 파트너로도 처음 진출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 공인회계사 자격(AICPA)를 취득하기도 했다.
단명하기 쉬운 컨설팅업계에서 34년째 딜로이트를 지키고 있는 그는 99년부터 딜로이트컨설팅코리아를 맡아 사세를 키우고 있다.
삼성등 다른 그룹들의 경우 30년동안 한 직장에 머문 최고경영자가 거의 없다.
CEO 평균연령이 낮은데다 계열사간 이동이 잦아서다.
삼성의 경우 현직 CEO의 대부분은 모기업격인 제일모직에서 회사생활을 출발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 "30년 외길"을 찾기 어렵다.
굳이 따지자면 69년 동방생명에 입사한 배정충 삼성생명 사장을 꼽을 정도다.
배 사장도 95~98년동안에는 삼성화재에서 근무했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