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강따라 '한라산 백록담 등반기'] 새하얀 감동 봉우리에 '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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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한라산 백록담은 쉽사리 자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도도한 명성대로 짙은 구름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난간을 붙잡고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바람도 거셌다.
온도계는 O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체감온도는 영하 7도 이상이었다.
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해보려고 계단에 웅크려 있기 10여분.
구름이 걷히는가 싶더니 드디어 둘레 약 3km,직경 500m크기의 화구호인 백록담이 자태를 드러냈다.
어렵게 올라온 수고로움이 잊혀질 정도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백록담이었다.
백록담에서 등산객들의 안전을 담당하고 있는 현상용(43)씨는 "겨울철에는 안개 끼는 날이 15일 이상이어서 백록담의 갠 모습을 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3대 영산(靈山)의 하나로 꼽히는 한라산 정상길이 9개월만인 지난 11월1일 다시 열렸다.
원래는 12월에 개장하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11월9일 제주서 열리는 83회 전국체육대회 개최에 맞춰 평년보다 1개월 먼저 개방된 것.
백록담을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욕망에 잠을 설쳐가며 새벽에 출발했지만 날씨가 너무 나빴다.
전날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는 멈췄지만 바람이 오히려 심해져 한라산 동쪽 등산로가 시작되는 성판악 휴게소 주변의 나무들이 몸통 채 휘청거릴 정도였다.
한라산에는 벌써 수 차례 눈이 내렸다.
며칠동안 비바람까지 잦았던 탓인지 가을의 흔적은 사그라지고 초겨울의 냉랭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한동안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웠을 나뭇잎들은 시커먼 현무암 자갈 길 위에 수북히 쌓여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앞서가는 등산객 몇몇을 제외하고는 인적도 드문 등산로를 걸어가는 기분이라니.
동행하는 이 없었더라면 더욱 쓸쓸했을 터였다.
세찬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소리만 숲 전체에 가득했다.
성판악 코스로 백록담에 오르는 길은 양쪽으로 숲이 우거져 주변 경치를 구경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고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식물군을 경험하는 맛이 있다.
산행 중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은 볏과의 다년초 식물인 제주조릿대다.
한라산 국립공원에서 31년째 근무하고 있는 양성남(48)씨는 "해발 750m인 성판악 휴게소는 난대림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참나무나 보리수나무 등 잎사귀가 넓고 사계절 푸른 상록활엽수가 많다"고 설명했다.
휴게소에서 1시간 20분 거리의 속밭(해발 1100m)에 이르기까지는 난대림 숲이 펼쳐진다.
속밭 부근에서는 25년 전 인공림으로 조성된 삼나무 길을 지나게 된다.
속밭에서 40여분을 가면 도착하는 사라대피소(해발 1200m)는 한대림 지역이다.
사라대피소에서 1시간 거리의 진달래밭 대피소(해발 1490m)에서는 구상나무를 포함한 고산식물과 철쭉,털 진달래가 자란다.
성판악 코스로 정상등반을 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12시까지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해야 한다.
등반 거리를 고려하면 오전 9시 이전에 성판악 휴게소를 출발해야 시간 안에 닿을 수 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부터 정상에 이르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사가 급해진다.
등산로 주변에 키 작은 나무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해발 1600m에 도달했을 즈음 산 전체에 병풍을 치고 있던 운해(雲海)가 걷히면서 서귀포시와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 떼의 구름이 걷히는가 싶더니 또 다시 구름이 몰려와 시야가 가려지기를 수 차례.
주변에 나무도 거의 없어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부딪혀야 했기에 체감온도가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다.
추위의 정도를 말해주듯 살얼음이 맺힌 나뭇가지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 오르기를 10여분.
바로 그 순간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던 가스 구름이 젖혀지면서 백록담 봉우리가 드러났다.
한라산 속에 또 하나의 작은 산을 연상시키는 백록담은 돌과 잡초들만 무성한 초원 위에 우뚝 솟은 채 왼편으로 서귀포 바다를 조망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의 8백여 미터는 목재 가드레일과 계단을 올라야 한다.
중간 지점부터는 바람의 세기가 한 층 더해지며 걷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어른 한 명 정도는 단번에 날려버릴 듯한 기세로 칼바람이 산 능선을 타고 휘몰아쳤다.
가드레일에는 수증기가 그대로 얼어붙어 날카로운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20여분 동안 칼바람과 "사투"를 벌인 끝에야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백록담 정상은 오후 1시 30분 이후로는 머물 수 없다.
하산에 소요되는 시간 때문이다.
또 다시 구름 속에 갇혀 버리는 백록담을 뒤로하고 아쉬운 하산길을 서둘러야만 했다.
글=정경진(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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