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터닝 포인트] 고사무열 <씨디네트웍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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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세 번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첫번째는 1991년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LG-CNS(당시 LG-EDS)의 프로그래머로 입사했을 때다.
비전공자로서 프로그래머를 선택한 데에는 곧 정보통신 혁명이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6년 데이콤으로 옮겨 사업기획 및 마케터로 변신한 이후 1998년 9월 내게 두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국내 최초이면서 아시아 최대규모의 인터넷데이터센터(IDC)인 KIDC(한국인터넷데이터센터)사업을 시작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던 것이다.
IDC란 서버를 관리.점검하는 일종의 서버호텔이다.
차곡차곡 쌓은 IT지식 위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팀 동료들과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KIDC구축 작업을 하면서 나는 안정적인 콘텐츠 전송을 원하는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접하게 됐다.
그리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던 중 CDN(Content Delivery Network)이라는 서비스를 처음 알게 됐다.
동영상을 끊이지 않고 고화질로 제공하는 것처럼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콘텐츠를 보다 빠르고 안정적으로 분산 배포하는 서비스였다.
당시 CDN서비스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서비스는 데이콤 뿐만 아니라 하나로통신,KT(당시 한국통신)등 국내 대형 네트워크 사업자들의 동참없이는 고객들의 큰 만족을 이끌어내기 힘들었다.
더 큰 그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 기업 모두의 지원을 받는 CDN서비스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이것이 나의 세번째 전환점이었다.
곧 주변의 모진 반대에 부딪쳤다.
우선 사업하는 장인을 보면서 사업하는 사람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내가 왜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냐며 강하게 만류했다.
주변 동료들의 반대와 진행할 일이 산적한 회사내 사정도 나의 마음을 편치 않게 했다.
그래도 LG-CNS,데이콤에서 함께 일했던 몇몇 직장 돌료들이 큰 힘을 실어줬다.
"함께 최고의 서비스를 보여주자"며 모인 것이다.
2000년 5월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씨디네트웍스"를 설립했다.
KT,하나로,데이콤 세 곳의 투자를 모두 받기까지 꼬박 여섯달이 걸렸다.
서로 경쟁관계인 거대 통신 사업자가 모두 함께 투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다 신생 벤처회사에 출자한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사이 다른 CDN업체에서 먼저 시범 서비스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국내 통신서비스를 이끌고 있는 세 업체의 지원 없이는 진정한 CDN서비스를 구현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0년 9월에 데이콤과 하나로가,10월엔 KT가 주주사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회사를 창립한 지 이제 2년 반.
국내 CDN 시장의 60%를 점유하면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용서비스 첫달인 2001년 4월 70만원에 불과하던 월매출이 4억원을 훌쩍 뛰어넘으며 올해 40억원,내년 1백2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고객사도 넥슨,코리아닷컴을 비롯해 80여개사에 이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고화질 동영상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있다는 흐뭇함이다.
씨디네트웍스는 지난 3월 국내 최초로 1메가 고화질 서비스를 구현해냈으며 10월엔 마이크로소프트(MS)사와 제휴를 맺고 MS의 차세대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인 "윈도우미디어9"를 적용한 VOD플랫폼인 "네피션트 익스트림"을 출시했다.
samuel@cdnetwork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