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점대칭 .. 배찬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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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면 투닥투닥 계단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남편은 자연스레 남 편이 된다.
수백 통의 그리움을 주고받으며 7년을 연애했고 아들을 낳아 기르면서 15년을 살았으니,내 인생의 반 이상은 한 남자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러기에 조율이 잘 된 현악기처럼 팽팽한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에 어느덧 달력의 빨간 날 같은 편안함이 자리 바꿔 앉아 있다.
선잠 속에서 더듬는 그의 손길이 좋았고,입 냄새 풀풀 풍기며 입맞춤해도 싫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은 24시간 완벽하게 내 편이었다.
"내가 행복하면 그도 당연히 행복하지"하며 아예 늘어지다 못해 줄 끊어진 악기를 들고도 내 멋대로 연주하고,그 소리에 도취되어 살아왔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참다운 자유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한 한용운님의 '복종' 시구처럼 나는 한 남자를 위해 즐거이 노예로 살아왔다.
그가 내 편이었을 때….
물론 지금도 남편은 내게 과분한 배우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남편은 가끔 남의 편이 된다.
나도 잘 모르는 여배우들의 사생활을 이야기 할 때면 웃고 있는 그 얼굴 위로 가을 수국의 진한 그림자가 일렁인다.
"당신 나에 대해서는 뭘 알지?" "이젠 AS도 할 수 없을 만큼 중고품이 되었다는 것."
우린 이렇게 공허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그 공허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이 나이쯤 되고 보니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내게 준 상처를 용서하는 것은 그리 말랑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쉽게 용서되지 않을 땐 한 발 비켜선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은 포기처럼 보이지만 인생에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내 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이다.
그는 알까?
불혹의 지뢰에 발목 하나 잘린 절름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때마다,서늘해지는 내 가슴을.
그는 모를까?
그 절름발이 보행은 이해하지만 잘려나간 그 발목을 용서할 수 없는 나를.
하지만 한 발 비켜서서 바라보면 우린 1백80도 점대칭 도형인 것을 깨닫기에 어서어서 이순(耳順)이 되라고 빈다.
귀가 말랑해지는 이순이 되면 나도 그도 지금의 상흔도 세상까지도,편안하게 용서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