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첫 선택-노무현] '노무현 당선자 걸어온 길'

"사시합격, 민주화 투쟁, 인권변호사, 3당 합당을 거부한 소신의 정치인, 국민경선 승리, 극적인 후보단일화 성공."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 붙어 다니는 '꼬리표'들이다. 세끼도 제대로 못먹는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낸 노무현이 극적으로 대통령에 뽑혔기에 그만큼 그의 지난 과거가 화제다. 성장기 =노 당선자는 1946년 경남 김해에서 과수원을 하는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입학금이 부족했다. 노무현의 어머니는 "책값만 먼저 내고 여름 복숭아 농사 지으면 입학금을 내겠다"고 사정했다. 그러나 학교측은 거부했다. 울며 매달리는 어머니 뒤에서 노무현은 "이런 학교 안 다녀도 좋소"라며 입학원서를 찢었다. 학교의 한 관계자는 "저런 놈 공부시키면 안된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결국 큰 형의 항의를 학교측이 받아들여 입학할 수 있었다. 노무현은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5급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큰 형의 권유로 3년 장학금을 받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고교졸업 후 어망회사에 다니다가 그만 두고 고시공부에 나선다.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하고 71년 고향에 돌아온 노무현은 그 해 10월 1차에 합격한다. 그러나 2차엔 2차례 연속 낙방한다. 73년 부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네 처녀인 부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한다. 75년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인간승리였다. 인권투사로 변신 =노무현은 대전지법 판사로 근무한지 7개월만에 그만두고 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연다. 개업을 한 변호사 노무현은 주로 등기업무 조세.회계 사건 등을 수임해 돈을 번다. 이런 그가 81년 부림사건을 변론하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한다. 그러다 82년 대학생 시절의 시위 경력 때문에 판.검사 발령을 받지 못한 문재인 변호사를 만나면서 '현실정치'에 눈을 뜬다. 88년 13대 총선때 노무현은 재야 몫으로 배정된 부산 남구 선거구 대신 기왕이면 '5공의 거물' 허삼수 후보와 맞붙겠다며 동구로 간다. 마침 공천 희망자들이 피하던 지역이라 흔쾌히 받아들여졌고 당선된다. 이것이 그의 두번째 인간승리였다. 5공 청문회 스타 =그는 88년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 비리와 관련한 5공 청문회에서 초선의원으로 일약 스타가 된다. 그러나 89년 3월 노무현은 의원직 사퇴서를 낸다.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해 보겠다고 국회에 들어왔지만 일개 의원의 역량이 너무 모자란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당시 김영삼(YS) 총재의 설득으로 잔류한다. 노무현은 90년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의 3당 합당에서 당시 김영삼 총재를 따르지 않고 당에 잔류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이 때문에 모두 6번의 선거에 나가 부산지역 3번 등 모두 4번 낙선하는 고배를 마시게 된다. 그의 최대 원군인 노사모가 결성된 것은 2000년 부산시장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을 무렵이다. 국민경선 후보 =낙선한 그에게 DJ는 그해 8월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긴다. 같은 해 9월 그는 민주당 부산후원회에서 당 대통령후보 경선출마를 선언한다. 그는 조직 계보 자금 등 아무것도 없었지만 '노사모' 등 자발적 지지자의 노력으로 경쟁자인 이인제 후보를 큰 차이로 누른다. 이것이 그의 세번째 인간승리였다. 이후 노무현은 60%에 가까운 지지도를 얻으면서 '노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도 두달. 그가 속한 민주당은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 선거에서 참패한다.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그의 후보 자리는 위태로워진다. 이 때 열렬 지지자들의 성원으로 점차 힘을 얻는다. 두달 가까이 논란이 붙은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 경쟁에서 극적으로 승리, 15%대까지 떨어진 지지도가 45%대로 일시에 반등한다. 그는 11월 중순까지도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에 밀려 당선 가능성이 15%에 불과했다. 그러나 젊은 서민 대통령,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의 적임자라는 이미지를 유권자에게 심어주면서 19일 드디어 대권을 잡았다. 네번째 인간승리다. 벼랑끝의 위기에서 살아나 꿈을 이룬 '억수로 재수좋은 사나이'인 것이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