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시대-21세기 첫 선택] (특별 기고) '시지푸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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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시지푸스'의 운명을 가졌군요 ]
이순원
아무래도 선거 전날 밤의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날 나는 어느 송년회 자리에 참석했다가 밤 열두 시쯤 집에 들어왔습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이 "아빠, 어떻게 해요?" 하며 당신에 대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지지 철회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지난 가을 당신이 가장 힘들어 할 때 내 컴퓨터 속에만 써서 보관하고 있던 '아아 노무현, 그리고 시지푸스'라는 글의 끝부분만 보강하여 당신의 공식홈페이지 '노하우'에 올렸습니다.
투표를 불과 몇 시간 앞둔 시간의 커밍아웃이었으니까 전국에서 가장 늦은 지지 선언이었던 셈이지요.
90년 3당합당 당시 통일민주당 당사는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에 있었고 제가 아직 전업작가로 나서기 전 근무하던 회사가 바로 그 옆에 있었습니다.
그날 당을 해체하는 마지막 의원총회를 연 다음 한 무리의 의원들이 건물에서 마당쪽으로 나와 어수선하게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빌딩 앞 시멘트 화단에 올라가 삼당합당 반대 구호를 외치자 사람들이 아래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 화단 위로 올라가 구호를 외치고 그러면 또 아래 사람들이 끌어내리고.
끌려내려오면 다시 올라가 구호를 외치고, 이제 구경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데 나중에 완력으로 끌려갈 때까지 아마 30분도 넘게 올라가고 끌려내려오고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신화 속의 한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지푸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신들의 떳떳치 않은 비행과 밀의에 대해 발설하길 좋아하고 게다가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몹시 마뜩찮은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찍힙니다.
아무리 밀어 올려도 결국엔 다시 굴러 떨어지고 말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을 받은 것도 제우스의 떳떳치 않은 비행을 발설한 괘씸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물이 귀해 몹시 고생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산위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의 모습 역시 그러했습니다.
삼당합당 이후 '인물도 정책도 없이 오로지 지역색만으로 치르는 선거'에서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부산에서 그 바위를 굴려올리다가 떨어지고, 시장 선거에서도 오로지 그 하나의 지역색으로 떨어지고, 어쩌다 보궐선거 때 힘들게 차지한 대한민국 정치1번지라는 종로 지역구조차 버리고 다시 부산에 내려가 치른 선거에서 또 떨어지고.
중재를 위해 찾아간 노사분규 현장에서 계란 세례를 받고, 그러면서 또 찾아가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던 과정도 그랬습니다.
홀홀 단신으로 경선에 나서 국민후보가 되지만 때맞춰 터진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와 당내 분열로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당내외의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당신은 다시 산 위로 바위를 밀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우여곡절과 온갖 양보 속에 받아들인 '후보 단일화' 결정 과정도 그러했고 선거 바로 전날 밤에 있은 지지철회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딛고 당신은 이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시지푸스의 그 바윗돌은 이제 산 위로 올라간 듯도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 눈에 지금 그 바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리석은 내 눈엔 당신의 당선 확정 순간 그 바위는 다시 산 아래에 내려와 있습니다.
당신은 다시 5년간 그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려야 합니다.
아니, 처음엔 그것이 바위였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길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당신의 삶과 당신의 정치 역정이 그렇기에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초심을 잃지 마십시오.
오직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입니다.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열 개이고 스무 개이고 서른 개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신이 고비마다 힘들 때 그런 당신을 일으켜 세운 사람도 국민이고 당신이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닦아준 사람도 국민입니다.
'노하우' 게시판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닥칠 좌절과 혹독한 시련의 시기마다 당신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어깨를 쓸어주지 않겠습니다. 이제 당신이 모두에게 손을 내미십시오. 모두의 어깨를 쓸어주세요. 두 눈 부릅뜨고 당신을 바라보겠습니다.'
선거 기간 동안에 당신은 가장 열렬하고도 든든한 후원자를 가졌지만 이제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엄혹하고도 무서운 감시자를 갖게 된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