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性比 .. 조명숙 <소설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딸아이가 방학을 맞아 부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딸아이가 곁을 떠난 지 벌써 한 해가 돼 간다. 남자 둘에 여자 둘이던 식구끼리 남녀 편을 나눠 옥신각신하던 재미도 딸아이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딸아이가 없는 동안 나는 은근히 수세에 몰려 있었다. 남편과 아들, 두 남자 사이에 끼여 살다 보니 설거지를 할 때나 텔레비전을 볼 때,청소를 할 때 등 남자들은 도대체 왜 이러냐고 늘 잔소리를 늘어놓아야 했고, 뭔가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자주 투덜대야 했었다. 곰살맞게 치워주고 거들어 줄 뿐 아니라 여자끼리 눈과 마음을 맞추곤 하던 딸아이였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오랜만에 균형을 잡아준 터에 세살배기 조카딸을 이틀 맡게 되자 괜스레 나는 들떠버렸다. 딸아이에다 쉬지 않고 조잘대는 꼬맹이 조카딸까지 합세했으니 그야말로 여자 만세였다. 아무튼 그동안 수세에 몰렸던 내가 남자들의 기를 꺾어 놓을 기회가 왔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이 되어 식구가 다 모이자 딸아이와 조카딸은 남편을 붙들고 계속 말을 붙이고 이리저리 잡아당기면서 그동안 돌부처처럼 나를 못살게 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남편에게 '이거 알아요, 저건 왜 저래요'하는 딸아이도 딸아이지만 유아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온 집안을 들쑤셔 죄다 끄집어내서는 만져보고 풀어헤쳐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조카딸을 상대하느라 남편은 쉴틈이 없었다. 이튿날이 되자 아침을 먹이느라 수선을 피우는 나와 제 치장하느라 왔다갔다 하는 딸아이, 이불에 쉬를 한 조카딸을 바라보며 남편과 아들녀석은 쓴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조카딸이 돌아가고 나자 집안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누나와 꼬맹이에 엄마까지 설쳐대는 바람에 잔뜩 구석으로 내몰렸던 아들녀석도 슬그머니 어깨를 폈고 남편은 적당한 위엄을 되찾았다. 성비(性比)를 따져보고 괜히 의기양양해 하던 나도 그쯤에서 한풀 기가 꺾였다. 물론 그동안의 소동은 손이 많이 가는 꼬맹이 조카딸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지만, 남과 여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남녀의 성정(性情)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을 때 오묘한 삶의 이치가 생겨나는 것이듯 성비의 균형이 깨지지 않은 지금 시점이 더없이 좋은 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