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로에 선 한국 IT산업..洪性秀 <서울대 교수>

지난해 전세계적 불황과 IT시장의 침체 속에서도 국내 IT기업들은 사상 최고의 매출과 이익을 창출하면서 국가 성장 엔진으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올해도 이런 성장동력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점차 심해지는 기술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앞으로 5년 뒤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고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국내 IT기업들은 아직까지는 상당부분 자본집약적인 제조업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메모리칩이나 휴대폰이다. 국내기업들이 IT산업분야에서 중국 등 후발국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는,무형적 첨단기술에 근간한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설계산업으로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 국내 주요기업들 역시 이런 필요성에 따라 비메모리반도체 등의 설계산업으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설계 중심의 고부가가치 IT산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춘 엘리트 엔지니어들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며,핵심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들을 육성해야 한다. IT산업은 그 특성상 다수의 첨단기술들이 매우 복잡한 가치사슬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휴대폰의 경우 소재 부품 모뎀칩 시스템과 응용소프트웨어 등의 산업들이 계열화돼 있다.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주요기술을 제외하고는 많은 기술들을 외부에서 조달한다. 이때 가치사슬상에서 한 두 기업이 독점적으로 기술을 장악하게 되는 취약고리가 발생하면,이 가치사슬에 참여하는 다른 기업들의 경쟁력은 극히 약화된다. 이런 취약고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핵심 설계기술에 대한 저변을 키워야 하며,두꺼운 층의 전문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불행히도 국내의 기업 현실은 이에 역행하고 있다. 2,3년전 활발한 벤처투자로 설립됐던 많은 전문기업들은 시장 진입에 실패했으며,여기에 참여했던 많은 핵심 엔지니어들이 게임,인터넷콘텐츠 등 국내 수요가 존재하는 곳으로 이직했다. 그 결과 수효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스템 엔지니어층은 더 얇아지게 됐다. 첨단기술을 갖고도 중소기업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국내시장 환경에서 대기업의 역할이 요구된다. 우리의 현실과 대비되는 대표적인 국가가 북유럽의 스웨덴과 핀란드다. 스웨덴의 인구는 6백만명에 불과하지만,수 많은 IT분야의 전문 중소기업들이 에릭슨과 노키아가 필요로 하는 첨단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기업들을 육성한 것은 바로 거대 기업들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수혜자로 스웨덴의 OSE사를 들 수 있다. 에릭슨과 노키아는 OSE의 소프트웨어를 채택함으로써 OSE사를 설립 3년 만에 전세계 통신시스템 시장에서 주목 받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북유럽의 이런 기업적 분위기는 리눅스를 창시했던 리누스 토발즈가 핀란드에서 탄생했다는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국제적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국내기술을 채택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도록 보육할 수 있다. 물론 이에 파생되는 많은 이익은 다시 대기업의 몫이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가치사슬상의 주요기술들을 국내기술로 대체함으로써 외국기업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흥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둘째,국내 중소기업과 대기업간 기술이전 상호협력 등이 용이해지게 된다. 셋째,이렇게 기술 친화적으로 형성된 시장환경 속에서는 엔지니어들은 첨단기술만 있으면 부족한 자본을 갖고도 과감하게 창업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우리의 IT산업은 시스템설계산업으로 변모해 가는 기로에 놓여 있다. 이제 대기업들은 미래를 위해 다각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시스템설계산업의 경쟁력은 결코 단기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며 인내와 꾸준한 투자,그리고 미래를 고려한 환경조성이 필요하다. 만일 현재와 같이 핵심기술을 외국에서만 조달하고자 하면 국내의 첨단 중소기업들은 성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결국 시스템설계기반 기술면에서도 산업의 공동화를 초래할 것이다. sshong@redwood.snu.ac.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