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대작 '영웅'] 이름없는 '진짜영웅'을 만난다

장이머우 감독의 무협영화 "영웅"은 여러면에서 리안 감독의 흥행작 "와호장룡"과 비견된다. 할리우드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두 영화는 동양의 현란한 검술과 무술인들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접목했다는 점에서 한 뿌리다. 그러나 두 영화가 펼치는 사유의 세상은 사뭇 다르다. "와호장룡"은 내면의 자유와 득도 등 개인적인 가치를 내세우면서 욕망의 늪에서 인생의 참의미를 건지려는 내용이었다. 반면 "영웅"은 대의와 희생 등 전체와 집단적인 가치를 앞세워 구국의 영웅들을 그려내고 있다. 영상은 눈부시게 수려하고 액션과 스케일은 "와호장룡"을 능가할 만큼 대담하다. 등장인물에서도 이연걸 장만옥 장쯔이 양조위 등 중국의 톱스타들을 망라한다. "와호장룡"의 주역 장쯔이가 여기서는 하수의 무예인으로 조역에 그치는 것은 아마도 견제심리가 작용한 듯 싶다. 2천2백여년전 중국 전국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후일 진시황에 등극하는 폭군 영정을 암살하려는 자객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작품속의 시대정신은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선악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들은 역신이거나 폭군이지만 또한 영웅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최상을 추구하지만 상반된 시각과 가치의 지배를 받는다. 자객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폭군을 단죄하려 들지만 이 경우 천하통일의 대업이 늦어져 백성들이 도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정은 포악한 군주이지만 통일을 앞당겨 백성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자객들의 이런 고민은 바로 영정과의 맞대결에서 깊어진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정치지도자로 뽑아야 하는 현대인의 고충과 흡사하다. 자객들은 승자의 역사에 가리워진 익명의 존재다. 영화는 역사에서 잊혀졌던 그들을 불러내 영웅의 칭호를 부여한다. 이연걸이 맡은 자객의 이름이 "무명"(無名)이란 것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름 모를 이들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시다. 엘리트가 아닌 주변인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뚜렷한 경향이다. 무명은 "천하"란 대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진다. "나는 죽지만 더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희망과 함께. 파검(양조위)도 대의를 위해 복수심을 버린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대의보다 비설(양조위)과의 진정한 사랑에 목숨을 건다. 영화는 무술을 음악이나 서예와 동일선상에 놓고 조명함으로써 동양적 일원론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탁월한 무술은 곧 뛰어난 정신세계이므로 신심불이(身心不二)인 것이다. 칼싸움과 악기연주를 병치하거나 빗발치는 화살속에서 서예로 가다듬는 장면이 그것이다. 파검은 극중에서 "무술과 서예는 순수와 진실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말한다. 주인공들의 심리변화에 따라 달리한 색감도 돋보인다. 도입부 적색은 열정과 오만,승리를 나타내며 청색은 순정과 희생,백색은 진실 등을 표현한다. 영화속 시간흐름도 이같은 순서다. 호수위에서 펼치는 대결은 "와호장룡"의 대나무밭 결투장면에 비견될 만큼 아름답다. 석궁으로 기와집을 뚫고 박살내는 장면도 전율할 만큼 강력하다. "영웅"은 시종 한 옥타브쯤 높은 톤을 유지하고 있다. 고음의 아리아를 1시간반동안 계속 들어야 한다면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24일 개봉,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