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사람들] '포항 어시장 여성중매인' .. 36년째 막강 '여성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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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6시.
포항시 죽도동 포항내항 죽도수산시장.
3천여개 상자에 가득가득 담긴 대게와 아귀,대구,가자미 등이 경매에 부쳐진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거부해온 다른 어판장과 달리 여성 중매인 20여명이 경매장 분위기를 주도한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가격을 표시하는 모습에 베테랑들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 곳 어시장 중매인 29명 중 26명이 여성이다.
50세를 넘긴 경력 수십년의 고참들이 대부분이다.
최초 여성 중매인인 78세의 김순봉 할머니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경매장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는 김 할머니는 "대구 등에서의 주문이 신통치 않은 것으로 봐서 요즘 경기가 별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포구에 '여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 68년.
이 곳이 법정 도매시장으로 바뀌면서 생겨난 포항수산합자회사가 전문 중매인을 찾지 못해 차선책으로 모집한 중매인이 바로 주변에서 생선 좌판을 하던 여성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금만 불투명하게 거래가 진행되면 바로 주먹다짐이 벌어질 정도로 어판장은 거칠었다.
이런 '금녀지대'에 뛰어든 용감한(?) 여성들은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수산시장 풍토를 확 바꿔 놓았다.
이들이 매일 처리하는 물량은 평균 5t,3천여만원어치 가량이다.
예전에는 주로 외지 큰 소매상의 의뢰를 받아 경매에 참여했지만 요즘은 직접 사들인 다음 수산상가와 소비자들에게 되팔고 있다.
중매인 조합도 결성했다.
관청 업무 등에 능한 점 등을 감안해 조합장에는 남자 중매인 유동석씨(72)를 내세우고,부조합장은 22년 경력의 김점덕씨(60·여)가 맡고 있다.
김 부조합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들이 할 일이 못된다'는 인식으로 바라보는 눈초리들이 곱지만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안정된 수입에다 어엿한 전문 직업으로 자리잡으면서 중매인이 되려는 여성들이 줄을 섰다.
중매인 자격을 따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1년간 중매 대리인으로 경력을 쌓은 다음 조합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최근 70번 중매인 김정자씨(42)가 어려운 관문을 뚫고 최연소 여성 조합원이 됐다.
중매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물림하려는 이들도 늘고 있다.
김순봉 할머니와 함께 죽도시장 산증인인 주분이 할머니(78)가 영업권을 며느리에게 넘겨준 것을 비롯해 최근 건강을 이유로 후계자를 키우는 베테랑 할머니들이 부쩍 늘었다.
2번 중매인 허선봉씨(42·남자)는 장모님의 자격을 물려받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줄곧 주창하고 있는 양성(兩性)평등이 이 곳에서는 오래 전 뿌리내린 셈이다.
이들은 요즘 큰 시름에 잠겨 있다.
경매에 나오는 생선이 격감하고 있는 것.
"몇 해 전만 해도 언제나 만선들이었지요.깃발을 있는 대로 나부끼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입항할 때는 선주나 어부뿐만 아니라 이 곳 어판장도 흥이 났죠."
26년째 중매인 일을 하고 있는 유동석 조합장은 "일본과의 어업 협상 이후 어획량 감소와 어선 감축으로 위판 물량이 갈수록 줄어들어 중매인들의 생활 기반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걱정했다.
포항=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