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회고-잊을수 없는 이야기] 이원태 <금호고속 사장>

지난 1996년 11월 중국 남경금호타이어유한공사의 대표로 준공행사를 준비할 때였다. 1억1천9백77만달러를 투자해 20개월만에 공사를 완료한 이번 프로젝트는 금호타이어의 첫 해외진출인데다 당시 중국 승용차타이어 부문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그룹의 관심이 높았다. 아시아나 전세기를 빌려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등 국내 귀빈들이 오기로 했고 장쑤(江蘇)성 성장과 당 서기 등 현지 고위직들도 참가하기로 예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주무부처인 중국 화공부 주수롄(顧秀蓮) 부장(우리나라 산업자원부 장관에 해당)의 참석을 요청하자 장쑤성 정부가 난색을 나타내지 않는가. 참석은 커녕 축사조차 하기 어렵다는 대답을 되풀이했다. 자초지종을 캐보니 장쑤성 정부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편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에서는 3천만달러 이상의 투자일 경우에는 중앙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1년~1년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장쑤성 정부는 투자를 빨리 유치하기 위해 3천만달러 미만의 4개 프로젝트로 쪼개 성 정부 차원에서 일을 진행시킨 것이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호적에도 없는 공장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중앙정부가 나중에 트집을 잡을 경우 대책없이 쫓겨나야 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이를 알게 된 그룹 수뇌부에서조차 염려할 수밖에 없었고,단순히 축하사절 차원에서 추진했던 중앙정부와의 접촉은 더욱 절실해졌다. 다행히 화공부 리용우(李勇武) 부부장(차관)은 지난 93년 베이징지사 대표로 처음 중국에 들어간 뒤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그는 톈진시 화공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타이어공장 건설 후보지로 난징과 톈진을 저울질하던 시기인지라 리 부부장과 많은 얘기를 나누곤 했다. 물론 타이어공장 착공지로 난징을 택한뒤 리 부부장과 공적인 업무관계는 끝난 상태였다. 무작정 찾아가 주 부장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예상대로 "중앙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은 일"이라며 불가능하다고 했다. 논리로 설득할 수 없게 되자 인간적인 정에 호소해야 했다. "내가 서울로 쫓겨가게 생겼다" "그렇게 심각하냐" "그렇다.우리로선 중앙정부 관계자의 참석이 절실하다" "내가 그렇게(서울로 쫓겨 가게) 할수는 없지 않느냐.내일 부장과 상의해 보겠다" 리 부부장은 다음날 주 부장의 축사를 대독하겠다며 참석의사를 보였다. 장쑤성 정부에서조차 자신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며 깜짝 놀랐다. 결국 준공식은 무사히 치를 수 있었고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그뒤 장쑤성 정부를 재촉해 중앙정부의 비준을 받았고 합법적으로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건대 리 부부장은 톈진시 재직시절 공장유치에 실패한 상태인지라 금호를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톈진과 논의가 끝난 뒤에도 성의를 다해 대해준 점을 고맙게 생각해 그에게 월병(月餠.추석때 인사치레로 돌리는 중국식 과자)을 보내는 등 꾸준한 신뢰관계를 쌓았던 것이 나중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지금 중앙정부를 대표해 마카오주재 연락판공실 주임을 맡고 있으며 아들 결혼식에도 서로 화환을 보내는 등 꾸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는 중국비즈니스에서 "콴시(關係)"의 중요성을 또 한번 깨닫게 된 해프닝이었다. 정리=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