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참여정부의 성공 조건..全哲煥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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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哲煥
16대 대통령선거를 거쳐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이념성향이 뚜렷하게 다른 이들의 인터넷 토론과 집회시위가 부쩍 늘었다.
인터넷을 통한 활발한 의견교환 및 온라인 매체의 부상은 물론,지난 84회 3·1절에 보인 진보와 보수성향의 열띤 집회와 시위가 그 예다.
사실 자유(시장)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이해집단이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고 이념차이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적대적 파괴수준의 갈등이 아니면 이념과 패러다임 경쟁은 오히려 사회의 동태적 발전을 유도한다.
따라서 이해갈등과 참여의사 분출이 상당한 혼란으로 비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오히려 건강한 민주사회의 다양성과 창발성을 나타내는 척도일 수 있다.
그리하여 새 정부도 '참여정부'의 기치를 걸고,다양하고 적극적인 민주적 의사분출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국정 방향으로 제시했다.
자칫 굴절되기 쉬운 대의제 하의 의사결정방식을 보완해 기층민의 뜻을 충실히 국정에 반영하고,현재의 정치구도도 개혁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참여정부가 지향하는 보통국민의 직간접 국정참여는,가장 오랜 민주주의 나라 그리스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민주정치의 이상이었다.
다만 직접민주주의의 현실적 물리적 한계와 비효율 때문에 선거를 통한 간접민주주의형의 대의제가 보편화된 것이다.
그러나 대의제는 보통국민의 국정참여가 선거에만 제한되는 대신,엘리트층과 기득권층의 국정의사결정 지배를 고착화시키기 쉽다.
때문에 국정에서 국민의 실질적 평등성과 보편성은 제약된다.
그리하여 2차대전 후 대의제의 한계극복을 목적으로 프랑스의 신좌파인 장 폴 사르트르가 앙가주망 철학과 현대적 참여민주주의를 제창했다.
참여민주주의는 '보통사람인 시민 학생 노동자가 국가와 직장내 (경영) 의사결정에 관여하기 위해 시위 집회 캠페인 청원 기부 조직의 설립과 가입 등의 행동'을 표출해 '직접 자기소속집단의 관리체계와 질서를 만들어 가는'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보통국민의 상시적 국정참여를 확대하기 위해서다.
아마 '참여정부'의 이상도 이런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다양성과 이해상충성이 내재하는 한,절대민주성과 효율성을 보장하는 이상적 현실 제도는 없다.
참여민주주의도 최선의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으로서는 상당한 제약요인을 지니고 있다.
첫째,어떤 제도 하에서도 선호의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사실과 운동법칙 인식,세계정신에 기초한 역사적 동향을 전문가 대신 참여다수의사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럴리도 없겠지만 이런 분야에 대한 대중참여 판단은 자칫 중세종교의 갈릴레오의 지동설 재판처럼 우화가 될 수 있다.
둘째,참여는 일반국민의 과학적인식과 확실하고 완전한 정보에 기초한 정책인식,그리고 정책입안의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참여국민의 옳은 정책판단을 위해서는 높은 시대인식과 도덕성을 갖춘 전문가 집단과 NGO 등의 도움과 참여가 밑받침돼야 한다.
셋째,국민의 선호 등 의견이 한 방향으로 모이지(單峯性) 않으면 다원적인 일반국민의사 모두를 특정정책에 반영할 수 없다.
그 결과 참여형 의사결정방식은 집단 서로간에 속박되는(committed) 관계형성을 야기하기 쉽고,조화성을 잃은 의사관철 대결이 자칫 무정부성 또는 무질서 현상을 빚을 수 있다.
이런 갈등관계의 효율적 조정은 정치의 몫이고,이런 정치구현은 참여민주주의 성공의 모습이다.
넷째,정책이 일관성을 상실하면 정책당국이 정책을 수립할 당시에는 최적이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최적성, 즉 합리성과 효율성을 확보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정부도 수시로 변하는 국민의사 수용에 급급해 정책의 동태적 일관성을 잃어서는 안된다.
'참여(민주주의)정부'의 출범은 신선하나,참여 자체는 대의제 민주주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목소리 큰 소수를 다수로 착각하는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에 빠지거나,특정제도와 정책에 대해서만 환상을 지녀서는 안된다.
오직 끊임없는 고민과 지혜로 연이어 생기는 모순을 극복해 가는 것만이 참여정부의 성공의 길이다.
chchon200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