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여자이기 때문에 .. 崔惠實 <KAIST 교수.국문학>

얼마 전 어떤 대학에 강연 초청을 받았다. 마침 그 학교에 재직중인 동기가 반갑게 맞이하며 점심을 사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기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학창시절 친구들과 그들의 근황,동창모임 등으로 흘렀다. 마흔 넘긴 동기들이 흔히 그렇듯 잘 나가는 직업을 가진 친구들끼리는 지속적으로 만나는 눈치였다. 물론 그 속에 여자인 나는 끼워주지 않는다. 20여년 전 시절을 말하던 끝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그 때,너 많이 괴롭혔을 거다" 나는 잘 구워진 꽃등심을 하나 씹어 삼키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하고 안 어울린게 전화위복이었던 것 같아" 정말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었다. 자기 학교에 초청받은 동기가 대견해서 밥까지 사준 사람에게 한 말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나는 80학번,소위 본고사 마지막 세대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여성계에 끼친 지대한 공적이 있었으니 바로 본고사 폐지에 선시험 후지원 제도였다. 당시 이른바 명문대 본고사 문제는 대단히 어려웠다. 여고 교과과정은 명문여대 입시방향으로 흘렀고,여러 면에서 여학생들이 남녀공학대로 진입하는데 제약이 따랐다. 자연히 명문 남녀공학대의 여학생수는 극히 적었다. 81학번 이후 입시제도의 개편으로 여학생의 남녀공학대 지원이 활발해졌다. 아무튼 당시엔 법대 사회대 경영대에 여학생이 한명도 없었고,인문대와 사대 쪽에 몇십명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남학생 위주로 짜여진 환경에서 소신있고 고집 센 여학생들은 시들어갔다. 여자화장실이 없는 강의동이 많아 얼마나 곤혹스러웠던지….남자인 것도 혜택인 것을,똑똑하기조차 한 남학생들에게서 여자의 약점들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과대표 학생회장 연구실조교자리 등도 제도적으로 남학생들에게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외적 억압과 내면의 열등감이 여자를 급속히 위축시켜 이내 자신을 똑똑한 남자들의 신부감 정도로 규정하게 했던 것이다. 한편 여대로 간 여학생들은 그 자체내에서 소수의 지도자들이 키워져 교수도 되고,장관도 되고,국무총리 후보감도 됐다. 그러나 더 중요한 힘은 명문여대 졸업생들의 남편이 명문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여자들이 사회의 저변을 이끄는 힘이 됐다. 언젠가 한 여대가 개교기념일에 부부동반 모임을 주선해 자신의 사위들 힘을,즉 자기학교의 실제 교세를 만방에 과시한 일도 있었다. 이 와중에 소수의 남녀공학대 여학생들은 갈 길을 잃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OO대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는 대학의 구성원이었지만,안에선 들러리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숫자가 적기에 여자들끼리의 연대도 미약했다. 그 중 소수는 성공해 역시 명문대 여학생이 출세한다는 인상을 심어줬지만,많은 여성들이 좌절해 가사에 전념하고 있다. 물론 그녀들은 오빠나 남동생의 대학진학을 위해 직장서 돈 벌어야 했던 당시 여성들에 비하면 행운의 케이스에 속한다. 학교 다닐 때,학계나 언론계에서 성공한 선배들과의 술좌석에서 단골로 등장하던 것이 여학생들 이야기였다. '어떤 여학생이 있었는데 이쁘고 학점도 좋아 무척 따라다녔다,그런데 요즘 만나보니 푹 퍼진 아줌마가 되었더라' 그 때 선배들의 득의양양했던 표정….지금 내앞의 동기는 이해할까? 나를 보고 씩 웃던 미소에서 선배의 그것을 떠올렸던 사실을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똑똑한 남학생들이 내게 주던 그 시선,'여자는 결국 시집가고 말기 때문에 소용없다'는 보편적 시선에 함몰되는 자신이 싫어 주위에 성을 쌓고 공부에 열중해서 빨리 박사 논문을 쓰고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자 동기들은 나를 독하다고 놀렸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로서 절도를 지키려 애썼다. 그러자 주위에서 '똑소리 난다'는 용어로 나를 평가했다. 여자도 남자와 더불어 대등한 입장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더니 어떤 선배가 나를 '욕심 많고,이기적'이라고 평했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강연을 끝내고 지하철을 탔다. 앉아있는 내 무릎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흐느낌 없이,코 한번 훌쩍이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choi@mail.kaist.ac.kr